달달 외운 100개의 정답, ‘답 없는 단 하나의 질문’이 이긴다

아르떼 2026. 7. 20.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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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박효진-이상한 나라의 그림책
정답이 없는 질문의 정답
존 로크 에세이 대회와 스스로 깊이 생각하는 힘

존 로크의 기침(起寢)

“체 게바라는 상징적인 티셔츠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있는가?”
“우리는 Chat GPT에 예의를 지켜야 하는가?”
“만약 당신이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잠시 생각하게 만드는 이 질문들은 2026년 올해 존 로크 에세이 대회에 공개된 논제들이다. 17세기 영국의 의사이자 철학자인 존 로크를 기리기 위해 열린 이 에세이 대회는 매년 150여 개국 수만 명의 학생이 참가하는 가장 유명한 글쓰기 대회이다. 존 로크 협회는 학생들이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설득력 있게 논증하며, 다르게 생각할 용기”를 갖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보통 연초 2월경에 논제가 올라오면 4개월가량의 시간 동안 본인이 선택한 논제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분석하며 깊이 생각한다. 철학, 경제, 신학, 정치, 심리, 법, 국제, 과학, 역사를 주제로 각 분야에 3개의 질문이 던져진다. 학생들은 단 하나의 질문만을 선택해 몇 달 동안 그 질문과 싸우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프린스턴 대학 등 각 분야의 전문 학자, 교수들이 직접 에세이를 평가한다. 완벽한 문법과 뛰어난 영어 실력을 평가하는 것이 아닌, 이 논제에 대해 얼마나 깊이 독립적으로 사고하였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핀다. 학자와 교수진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나만의 독창적인 글을 선보여야 한다.

존 로크 에세이 대회에서는 ‘표절’에 대해서도 엄격한 규칙을 내세우고 있다. 참가자는 대규모 언어 모델(예: Chat GPT) 및 관련 AI 도구를 사용하여 자신의 사고를 발전시키고, 논리를 검토하며, 주장에 허점이 없는지 점검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대신에 인간 저자를 대신하는 존재로 사용하는 것은 금지하고 있다. AI는 연구를 돕는 도구이자 함께 생각하는 파트너로 사용하는 것은 허용하나 에세이는 독창적인 자신만의 표현으로 쓸 수 있어야 한다.

수상 구조는 본선 진출(Shortlist), 심사위원 특별상(High Commendation), 심사위원 최우수 특별상(Very High Commendation), 부문 대상(Category Winner), 전체 대상(Grand Prize)이다. 작년 2025년 기준 6만여 편의 에세이 중 공식 수상자는 단 25명 정도였다. 수상한 학생들은 옥스퍼드, 케임브리지를 포함한 해외 명문대에 지원 시에 매우 높은 평가를 받으며 유리한 장점으로 작용한다.

수만 명의 학생이 수개월을 고민하는 장면과 몇 명의 학자들이 수만 개의 에세이를 읽으며 고군분투하는 장면이 교차되었다. 이쯤 되면 도대체 어떤 글이 그랑프리의 주인공이 되는지 궁금하다. 존 로크 협회 사이트에서는 매년 가장 우수한 에세이들이 공개되어 누구나 읽을 수 있게 등재되니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하는 아이들부터 다 큰 성인들까지도 한 번쯤은 꼭 읽어볼 만하다.

수상한 글들의 흥미로운 점은 글이 화려하다거나 유수한 미사여구를 써서 읽는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 문장이 매우 명확하고, 어려운 단어나 표현을 쓰지 않았다. 청소년들의 수준에서 쓸 수 있는 담백한 문장이지만, 깊이 고민하고, 생각한 흔적이 보였다. 넓은 범위의 조사 결과와 그 사실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자문하며 논제의 질문을 끝까지 붙드는 태도가 돋보였다.

존 로크는 저서 <인간지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에서 인간의 마음을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빈 서판(Tabula Rasa)’에 비유했다.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수학, 도덕, 종교 같은 지식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듣고, 만지고, 경험하면서 배운다는 이론이다. 존 로크의 이름으로 빈 서판을 빼곡히 채워나가고 있는 많은 학생의 노력을 보며 나의 학창 시절을 반추하게 되었다. 수업 시간에 배웠던 단답형의 철학자 이름, 역사의 사건, 경제적 현상 등에 대해 반문을 해본다거나 몇 개월씩 고민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었는가에 대해 말이다. 존 로크 에세이 대회는 잠들어 있는 생각을 일으켜 세우는 하나의 '기침(起寢)'이다.

Think! Rethink!

유년 시절 윤리, 사회, 과학 시험 전에는 주관식으로 무슨 문제가 나올지 필기해 놓은 공책과 교과서를 보며 단답형의 예상 정답을 달달 외우곤 하였다. 적어도 주관식으로 적어낼 예상 문제의 답이 생각해야 하거나 애매한 문제는 없었으므로 정확한 정답만을 외우고, 시험에 그 문제가 나오면 잘 외워두었던 나 자신을 뿌듯해했었다. 내가 외웠던 것은 답들은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휘발되었다. 나의 기억은 이미 사라졌음에도 훗날 그 철학자의 이름을 들으면 마치 잘 알고 있는 착각마저 드는 것이 더 큰 부작용이었다.

내가 공부했던 것은 상식에 불과한 이름뿐이었지 본질에 대한 질문은 아니었다. 정답을 맞히는 데에는 익숙했지만, 그 답이 왜 정답인지 오래 붙들고 생각해 본 기억은 많지 않다.

존 로크 에세이 대회가 특별한 이유는 학생들에게 뛰어난 글을 요구해서가 아니다. 한 편의 에세이를 쓰기 위해 몇 달 동안 하나의 질문을 품고 살아가게 한다는 데 있다. 책을 읽고, 역사 속 사례를 찾아보고, 자기 생각을 의심하고, 다시 쓰고, 또 고쳐 쓰는 시간. 그 인고의 과정에서 아이들은 단지 글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고 나를 이해하며 알아가는 방식을 배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답을 가르쳤는지보다, 얼마나 좋은 질문을 건넸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림책 한 권을 읽고 "왜?"를 묻는 일, 역사 속 한 장면을 보며 "다른 선택은 없었을까?"를 상상하는 일, 서로 다른 생각을 끝까지 경청하는 일. 그런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 한 사람의 철학이 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된다.

‘생각하라. 그리고 또다시 생각하라.’

어쩌면 교육이 아이들에게 남겨주어야 할 것은 많은 정답이 아니라, 정답이 없는 단 하나의 좋은 질문인지도 모른다.

박효진 길리북스 대표


*출처
-인간지성론(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