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으로 인간 비추는 로랑 카르동 "글 없는 그림이 더 멀리 갈 때까지"
그림책 작가 로랑 카르동이 바라본 인간과 사회

수많은 닭들이 소용돌이치듯 움직인다.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이루는 듯하다가도, 이내 먹이와 자리를 두고 티격태격하며 활기찬 풍경을 만들어낸다. 얼핏 보면 평범한 동물들의 이야기지만, 몇 장을 넘기다 보면 독자는 어느새 그 안에서 인간 사회를 발견하게 된다. 프랑스 그림책 작가 로랑 카르동(Laurent Cardon)의 대표작 『닭 이야기』 시리즈는 유쾌한 유머 속에 차이와 공존, 공동체에 대한 질문을 담아내며 전 세계 어린이와 어른 모두에게 사랑받아 왔다.
애니메이션 명문 학교 레 고블랭(Les Gobelins)을 졸업한 그는 30여 년 동안 애니메이션 제작 현장에서 슈퍼바이저와 아트 디렉터로 활동하며 스페인, 중국, 베트남, 한국 등 여러 나라를 오갔다. 지금은 브라질에 정착해 60여 권의 그림책을 펴낸 작가이자 실사 영화의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한 화면 안에서 어우러지는 그의 작품에는 인간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관찰과 따뜻한 시선이 공존한다. 한 장의 그림 안에 수많은 존재와 관계를 담아내는 작가. 로랑 카르동은 동물들의 세계를 통해 인간 사회의 어떤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까?

▶ 프랑스에서 태어나 여러 나라와 문화권을 오가며 살아오셨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공동체와 인간을 바라보는 작가님의 시선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저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프랑스가 아닌 외국에서 보냈습니다. 열아홉에 떠난 남미 여행을 시작으로 브라질에 정착해 30년을 살았고,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도 7년을 머물렀죠. 이 경험을 짧게 요약하기란 늘 조심스럽습니다. 자칫 클리셰로 그 풍요로운 문화들을 납작하게 만들어 버릴까 봐서요.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낯선 이들, 그 무심히 지나치는 얼굴들 속에는 저마다 귀 기울일 가치가 있는 놀라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죠. 아무리 이방인처럼 느껴져도 소통의 장벽을 한 번 넘고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풀어내기만 하면, 우리는 인간의 아름다움은 물론, 결점과 모순까지도 껴안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끊임없이 되뇝니다. 낯선 이를 받아들여라, 너 또한 어딘가에선 낯선 이가 될 테니."
▶ 작가님의 『닭 이야기』 그림책은 민주주의와 공동체, 성평등 같은 묵직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유머러스하게 풀어냅니다. 철학적 주제와 어린 독자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으시나요?
(*『닭 이야기』 시리즈는 『사라진 알을 찾는 가장 공평한 방법』, 『사라진 루크를 찾는 가장 공정한 방법』, 『서로를 이해하는 가장 올바른 방법』 등 여러 작품이 한국어로 번역·출간되며 국내 독자들과도 만나고 있다.)
"저는 아동 문학은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로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안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의미를 발견하고, 어른들은 더 깊은 주제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훈을 앞세우거나 바람직한 행동을 노골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을 지양합니다. 생각할 거리를 남기면서도 끝까지 '이야기'로 읽히는 책이 좋은 그림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가장 관심을 두는 주제는 차이와 공존입니다. 사회적 갈등과 다양한 가치가 충돌하는 브라질에서 살아가며, 서로 다른 존재들이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 편견과 차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아이들의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머는 가장 좋은 도구라고 할 수 있죠. 웃음은 무거운 주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고, 결점 있는 인물들을 더욱 사랑스럽게 만들어 주거든요. 닭을 주인공으로 선택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닭들의 위계질서와 소란스러운 공동체 속에는 인간 사회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 애니메이션에서는 움직임으로, 그림책에서는 한 장의 이미지로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두 매체를 경험한 작가로서, 각각의 언어는 현재 작업 안에서 어떻게 만나고 있나요?
"제게 그림책은 애니메이션과 영화 언어의 연장선입니다. 애니메이션 작업을 통해 인물의 움직임과 몸짓, 표정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법을 배웠고, 스토리보드를 통해 장면의 구성과 이야기의 흐름을 설계하는 감각을 익혔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그림책에서도 이어집니다.

작가 겸 일러스트레이터로 처음 펴낸 책들은 글 없는 그림책이었습니다. 저는 늘 이미지만으로 이야기를 얼마나 멀리까지 끌고 갈 수 있는지 시험하기를 좋아했어요. ‘이미지가 더는 홀로 설 수 없을 때만 글을 넣어라.’ 이것은 제 작업의 원칙이기도 합니다. 물론 글이 부차적이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그림책처럼 멈춘 화면일수록 한 장의 이미지가 독자의 상상력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하지요. 그래서 인물의 표정과 움직임, 화면 속 관계 하나하나가 더 많은 이야기를 전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제가 애니메이션을 잠시 접어둔 건 24페이지로 이야기하는 일이 1초에 24프레임을 만드는 것보다 덜 고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게으름 때문일까요? (웃음)"

▶ 한국에서 보낸 시간은 작가님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요?
"한국은 제가 처음 경험한 아시아 국가였습니다. 1991년부터 2002년 사이, 총 2년 반 정도를 지냈죠. 당시 저는 한국의 오래된 역사와 문화에 대한 기대를 품고 왔지만, 정작 마주한 것은 급격한 변화의 시기를 지나던 한국이었습니다. 가족 중심의 전통을 지키려는 가치와 현대화를 향한 열망이 공존했고, 세대 간의 다양한 갈등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긴장과 변화가 오히려 한국 문화의 활력과 창의성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한국 스튜디오에서 애니메이션 프로덕션 슈퍼바이저로 일하며 동료들과 캐릭터의 움직임과 감정 표현 연기에 대해 깊이 대화할 수 있었던 것은 제게 큰 행운이었습니다. 초당 24프레임으로 움직임과 감정을 낱낱이 분해하는 그 정밀한 작업이야말로, 타 문화를 이해하는 가장 섬세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일이 없는 날에는 궁궐과 시장, 오래된 골목, 사찰 주변 풍경을 스케치했습니다. 특히 마법 같았던 인사동의 풍경이 지금도 생생한데, 그곳은 여전히 그대로일지 궁금하네요."


▶ 지난 4월, 한불수교 140주년을 맞아 한국에서 열린 그림책 전시 《같은 꿈, 다른 색》에 참여하셨는데요, 작가님의 작품을 마주한 관객들이 어떤 경험을 하길 바라셨나요?
"전시 제목처럼 우리는 모두 각자의 색깔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저는 관람객들이 작품을 단순히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 시선은 먼저 어디로 향하는가?", "화면 속 역동적인 선들은 나를 어디로 이끄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길 바랐습니다.
닭들의 혼란스러운 행렬이 낯설고 당황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렇지 않나요? 어느 순간에는 고집불통인 수탉을 만나고, 또 어느 순간에는 부당함에 목소리를 내는 암탉이 되어야 하죠. 닭들의 입장을 두고 토론하고 음미하는 일은 관람객 각자의 몫으로 남겨 두고 싶습니다. 제 메시지는, '메시지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이야기 나눌 거리가 있을 뿐이지요.

로랑 카르동의 그림책은 하나의 주인공을 따라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수많은 존재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하나의 사회에 가깝다. 한 장면 안에는 각자의 욕망과 성격을 가진 닭들이 뒤엉켜 있고, 독자는 그 작은 공동체를 들여다보며 그 안의 질서와 갈등을 발견하게 된다.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낯설게 다가오는 닭들의 세계는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다. 완벽하게 조화로운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부딪히고 타협하며 함께 살아가는 과정 자체가 로랑 카르동이 보여주는 이야기의 힘이다.
파리=한지수 미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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