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리히터 선율과 감각적 안무 전 악장 토슈즈를 신었다 벗는 파격 기후 위기 서사 속 처절한 아름다움 3년 차 시즌 발레단이 증명한 ‘내일’
클래식부산과 (재)부산문화회관이 공동 제작한 부산오페라하우스발레단의 2026 부산발레시즌Ⅱ ‘사계: 타임 인 타이즈(Time in Tides)’ 공연이 지난 17~18일 이틀 동안 부산문화회관 중극장에서 개최됐다. 사진은 ‘가을’ 파트의 3인무(김희현 객원수석, 이승민 단원, 이주호 수석) 드레스 리허설 모습. 클래식부산 제공
시즌 예술단체 3년 차를 맞은 부산오페라하우스발레단(예술감독 김주원)이 선보인 창작 발레 ‘사계: 타임 인 타이즈(Time in Tides, 시간의 물결)’는 완성보다 가능성을 증명한 무대였다. 라이브 오케스트라와 미디어 연출, 그리고 젊은 무용수들의 에너지가 결합된 이번 공연은 지역 발레단의 현재와 다음을 동시에 보여줬다.
지난 17일 오후 부산문화회관 중극장. 올해 부산발레시즌 두 번째 작품으로 초연된 이 공연은 지난 8일 프레스콜(부산일보 7월 10일 자 19면 보도)을 통해 일부 공개되며 기대를 모았고, 본 무대에서 그 밀도를 한층 끌어올렸다. 막스 리히터의 ‘사계’를 바탕으로 한 음악과 유회웅의 안무는 감각적인 흐름 속에서 긴밀하게 맞물리며 관객을 끌어들였다.
공간의 제약을 연출로 전환한 공연의 시작부터 인상적이었다. 오케스트라 피트가 없는 중극장의 구조를 활용해 18명의 연주자(2026시즌 클래식부산오케스트)가 무대 하수에서 상수 방향으로 이동하며 등장했고, 바이올리니스트 김재원과 김광현 지휘자 역시 같은 동선으로 무대에 올랐다. 무대 상수 뒤편에 자리한 오케스트라는 객석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동선 자체가 라이브 연주의 존재를 환기하는 장치로 기능했다. 비록 연주자들의 모습이 온전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익숙한 선율이 공간의 한쪽에서 흘러나오며 음악의 시작과 변화가 더욱 입체적으로 감지되는 경험을 만들어냈다.
부산오페라하우스발레단의 2026 부산발레시즌Ⅱ ‘사계: 타임 인 타이즈(Time in Tides)’ 드레스 리허설 모습. 클래식부산 제공
시선을 중앙으로 묶어낸 것은 계단식 레이어로 구성된 3단 LED 패널과 조명이었다. 사계절의 자연을 구현한 영상은 시공간의 전환을 유연하게 만들고 무용수의 신체 표현을 확장하는 데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다만 3단 LED 패널의 강한 색채와 밝기는 장면에 따라 시선을 분산시키며, 무용수 신체의 섬세한 결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아쉬움도 남겼다.
그럼에도 무용의 완성도는 짧은 시간 사이에도 분명한 진전을 드러냈다. 프레스콜에서 ‘봄’이 얼어붙은 대지의 균열과 생명의 ‘징후’에 가까웠다면, 본 공연에서는 동작의 연결과 군무의 호흡이 정돈되며 ‘피어남’의 단계로 확장됐다. 특히 군무의 간격과 타이밍이 안정되면서 개별 동작이 아닌 흐름으로서의 이미지가 또렷해졌다. 음악과 조명, 의상이 하나의 리듬으로 맞물리며 장면의 설득력을 끌어올렸다.
부산오페라하우스발레단의 2026 부산발레시즌Ⅱ ‘사계: 타임 인 타이즈(Time in Tides)’ 드레스 리허설에서 박소정 모습. 클래식부산 제공
부산오페라하우스발레단의 2026 부산발레시즌Ⅱ ‘사계: 타임 인 타이즈(Time in Tides)’ 드레스 리허설에서 김소은, 이승민, 신승우, 장유미 모습. 클래식부산 제공
‘봄’에서 무용수들이 나비처럼 날아오르며 펼친 ‘그랑 제떼’는 청각적 이미지와 시각적 장면이 교차하는 순간을 만들어냈다. 동일한 시폰 드레스를 착용한 군무는 성별 구분을 지우며 젠더리스한 생명성을 강조했고, 이어지는 흐름은 점차 기후 위기의 서사로 이동한다. LED 위에서 펼쳐진 박소정의 솔로는 이러한 전환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부산오페라하우스발레단의 2026 부산발레시즌Ⅱ ‘사계: 타임 인 타이즈(Time in Tides)’ 드레스 리허설 모습. 패널 위에서 춤추는 이가 부산 출신의 박소정이다 클래식부산 제공
부산오페라하우스발레단의 2026 부산발레시즌Ⅱ ‘사계: 타임 인 타이즈(Time in Tides)’ 드레스 리허설에서 김희현 객원수석 모습. 클래식부산 제공
특히 이번 작품에서 무용수들이 전 악장에 걸쳐 토슈즈를 신었다 벗기를 반복하는 연출은 매우 상징적이다. 발레의 상징인 토슈즈를 벗고 일반 슈즈로 갈아신은 채 대지를 딛고 구르는 컨템포러리적 움직임과, 다시 토슈즈를 조여 매며 클래식 발레의 수직적 미학으로 복귀하는 이 반복적인 행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처절한 퍼포먼스다.
부산오페라하우스발레단의 2026 부산발레시즌Ⅱ ‘사계: 타임 인 타이즈(Time in Tides)’ 드레스 리허설 모습. 클래식부산 제공
‘여름’에서는 갈라진 대지를 연상시키는 의상과 함께 이러한 움직임이 더욱 맹렬해진다. 수직과 수평의 미학을 오가며 지상의 에너지와 속도를 강조하는 듯한 신체 표현은, 뜨거워진 지구 위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인류의 처절한 서사를 배가시켰다.
부산오페라하우스발레단의 2026 부산발레시즌Ⅱ ‘사계: 타임 인 타이즈(Time in Tides)’ 드레스 리허설에서 권도현 모습. 클래식부산 제공
부산오페라하우스발레단의 2026 부산발레시즌Ⅱ ‘사계: 타임 인 타이즈(Time in Tides)’ 드레스 리허설에서 김효은과 김보경의 듀엣 무대. 두 사람 모두 부산 출신이다. 클래식부산 제공
부산오페라하우스발레단의 2026 부산발레시즌Ⅱ ‘사계: 타임 인 타이즈(Time in Tides)’ 드레스 리허설 모습. 클래식부산 제공
‘가을’의 3인무 ‘파 드 트루아’는 작품 전체에서 가장 응집력 있는 장면 중 하나였다. 김희현 수석객원, 이주호 수석, 이승민 단원은 고도의 테크닉과 유기적인 호흡으로 긴장과 균형이 교차하는 순간을 설득력 있게 펼쳐냈다. 이어지는 ‘겨울’에서는 무너진 세계 속에서 다시 생명을 일으켜 세우는 장면이 상징적으로 제시되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50분 남짓의 짧은 공연이었지만, 각자가 체감한 사계절의 결은 서로 달랐을 것이다. 문득 생각했다. 이제 겨우 3년 차를 맞은 부산오페라하우스발레단은 사계절의 어디쯤 서 있는 것일까. 완성이라는 계절에 도달했다고 말하기는 이르지만, 적어도 다음 계절로 나아갈 힘과 방향만큼은 분명히 증명해 낸 무대였다.
공연을 마친 뒤 객석을 나서며 삼삼오오 나눈 대화 중에도 가장 많았던 게 “오늘내일 2회 공연으로 끝내기엔 너무 아쉽다. 내년 대한민국발레축제엔 꼭 가면 좋겠다”였다.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 이들의 다음 추가 공연 소식이 벌써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