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선 캐러밴, 건국 250주년 미국이 마주한 프런티어의 소멸[서중해의 경제망원경](65)

미국이 올해로 건국 250주년을 맞이했다. 지난 7월 4일 독립기념일에는 미국 전역과 전 세계 곳곳이 뜻깊은 날을 축하하는 화려한 불꽃놀이가 하늘을 수놓았다. 그러나 축제의 열기 뒤에 가려진 미국의 실제 분위기는 밝지만은 않았다. 건국 250주년을 앞두고 수행된 주요 여론조사 결과는 오늘날 미국인들이 느끼는 착잡한 심경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올해 5월 시행된 갤럽(Gallup)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단 19%만이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건국 선조들이 “현재의 발전한 국가 모습에 만족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반면 압도적인 다수인 77%의 미국인은 “선조들이 오늘날의 모습에 실망할 것”이라 답했다. 2001년 동일한 문항에서 “실망할 것”이라는 응답이 42%였던 것과 비교하면, 불과 한 세대 만에 부정적 인식이 2배 가까이 증가했다.
국가적 자부심의 하락은 시카고대 여론조사센터(NORC)의 조사에서도 드러난다. 성인 25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나라”라는 응답은 25%에 그친 반면, “미국보다 더 나은 나라가 많다”는 응답이 30%를 기록했다.
2016년의 조사와 비교했을 때 국가적 자부심이 현저하게 약화한 수치다. 또 ‘미국’이라는 국가를 한 단어로 표현할 때 ‘자유’와 같은 전통적인 긍정어뿐만 아니라 ‘쇠퇴’와 ‘불공정’이라는 무거운 단어가 동시에 등장했다.
미국을 지탱한 프런티어 정신 사라져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 등 다른 조사 역시 세부 항목은 달랐지만, 전반적인 기류는 일치했다. 미국인들의 애국심은 여전하고, 특히 공화당 지지층과 고령층에서 이러한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지만, 현재의 시스템과 미래에 대한 비판과 불만 또한 격렬해졌다. 조사 결과는 확연한 당파적 분열을 보여주며, 미국인들이 ‘아메리칸 드림의 약화, 민주주의의 후퇴 그리고 자유에 대한 위협’을 심각한 위기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네덜란드의 문화경제학자 아르요 클라머(Arjo Klamer)는 유럽의 정체되고 고착화한 사회를 “요새(Citadel) 사회”라고 부른 반면, 미국을 끊임없이 이동하고 유연하게 변화하는 “캐러밴(Caravan) 사회”라 명명한 바 있다. 경제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19세기 후반 30세 이상의 미국인 중 무려 3분의 2가 대륙을 가로지르는 대규모 이주를 감행했지만, 당시 영국인은 단지 4분의 1만이 섬나라 안에서 자리를 옮겼다.
미국 역사학자 프레더릭 잭슨 터너(Frederick Jackson Turner)는 캐러밴 사회의 역동성을 ‘프런티어 명제(Frontier Thesis)’로 집약했다. 1893년 발표한 논문에서 터너는 미국의 독창적인 민주주의와 국민성이 유럽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야생과 문명이 충돌하던 경계지대인 ‘프런티어(Frontier)’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했다고 선언했다.
터너에 따르면 프런티어는 철저한 평등주의와 개인주의의 요람이었다. 거친 자연 속에서 오직 생존을 도모해야 했던 개척자들에게는 세습 자산이나 구체제의 신분 구조가 통하지 않았다. 오직 개인이 가진 실용적인 능력과 정직한 땀방울만이 유일한 척도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 특유의 실용주의와 강인한 독립심이 형성됐다.
나아가 프런티어는 대도시의 불평등과 계급 갈등을 흡수하는 사회적 ‘안전밸브’였다. 동부의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되고 억압받던 노동자들은 언제든 서부라는 출구를 통해 새로운 삶을 개척할 수 있었다. 19세기 후반 미국의 경이로운 이동성은 바로 이 안전밸브가 작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실증적 증거였다.

현대 역사학계의 비판처럼 터너의 주장은 백인 남성 중심의 개척을 미화하고, 그 과정에서 가차 없이 강탈당하고 말살된 원주민(인디언)의 비극을 은폐했으며, 아시아계 철도 노동자나 여성 등 다양한 주체의 기여를 배제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럼에도 프런티어 정신이 미국을 지탱해온 강력한 성장 엔진의 하나였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건국 250주년을 맞이한 오늘날 미국은 과거의 찬란했던 지리적 역동성과 프런티어 정신을 더 이상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현대의 실리콘밸리가 인공지능(AI)과 디지털 경제를 무대로 ‘기술적 프런티어’를 끊임없이 재발명하며 혁신을 선도하고 있지만, 국가 전체를 덮은 퇴조의 징후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공간적 대안이 사라진 자리에 불평등의 장벽이 공고해졌기 때문이다.
오바마 정부의 경제자문위원장으로 재직 중이던 2012년 앨런 크루거(Alan Krueger) 교수는 “위대한 개츠비 커브(Great Gatsby Curve)”를 통해 현재 미국이 당면한 경제적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이 커브는 소득 불평등이 심화할수록 세대 간 계층 이동성이 제약된다는 상관관계를 시각화해 보여준다.
불평등 완화 미국 정체성 지키는 열쇠
북유럽과 달리 미국은 높은 불평등과 낮은 이동성을 기록했으며, 크루거 교수는 이 추세가 지속하면 다음 세대의 이동성이 현저하게 (25% 이상) 악화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커브는,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서 주인공 개츠비가 아무리 막대한 부를 쌓아도 끝내 공고한 상류층의 벽을 넘지 못하고 파멸했던 것처럼, 자수성가를 통한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완전히 끊어진 사회를 상징한다.
크루거 교수는 고착화한 불평등이 단순히 도덕적 정의의 문제를 넘어, 인적 자본 투자를 감소시키고 기회의 평등을 훼손해 장기적으로 경제 성장 자체를 저해하고 사회적 분열을 초래한다고 강조했다. 아메리칸 드림이 <위대한 개츠비>처럼 허망한 신기루로 변해가는 상황에서 불평등의 완화야말로 미국의 정체성을 지키는 핵심 열쇠라는 역설이었다.
바깥에서 바라본 미국의 건국 250주년 행사는 깊은 내부의 고민을 가리기 위한 화려한 불꽃놀이였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부서지고 민주주의적 가치가 당파성으로 얼룩진 상태에서 터뜨리는 불꽃놀이는 내부의 국민에게도 외부의 관찰자에게도 감동을 주지 못한다.
과거 미국이 찬란했던 이유는 광활한 영토와 강력한 군사력 때문이 아니라 계급의 요새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이동하며 기회를 창출했던 캐러밴 사회의 역동성, 즉 프런티어 정신에 있었다. 미국이 진정으로 되찾아야 할 것은 외형의 화려함이 아니라 평등한 기회와 계층 이동성이 살아 숨 쉬는 ‘새로운 프런티어’ 개척일 것이다.
서중해 경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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