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폭염에 뜨거운 빵 굽기, 에어컨 꿈도 못꾼다…비냉방 지하철 상가의 더위 사투 [세상&]
서울 지하철역 51곳 비냉방, 승객·상인 고역
상인들 찜통 속 영업 “얼음물 마시며 버틸 뿐”

[헤럴드경제=전새날 기자·이준영 수습기자] 서울의 낮 최고기온이 34도, 최고 체감온도가 35도까지 치솟은 지난 13일 오후. 안국역 지하에 입점한 한 화실 문을 열었더니, 통로보다 후끈한 공기가 먼저 밀려왔다. 가게 안에는 가정용 선풍기 두 대와 소형 냉풍기 한 대가 돌아가고 있었다.
약 40년째 이곳 화실을 운영하는 정재순(63) 씨는 “여름이면 더위 때문에 수강생들이 잠시 쉰다고 했다가 아예 나오지 않는 경우도 많다”며 “평소보다 여름 수강생은 절반 가까이 줄어든다”고 토로했다.
1985년 문을 연 안국역은 서울 지하철의 대표적인 ‘비(非)냉방 역사’다. 안국역 지하에는 상가 11곳이 입점해 있지만 모두 냉방 시설이 없거나 여건이 열악했다. 연일 폭염이 이어지면서 냉방시설이 없는 서울 지하철 역사 상가들이 ‘찜통’으로 변하고 있다. 상인들은 이동식 냉방기와 선풍기, 얼음물에 의지한 채 하루를 버텼다. 드나드는 손님은 줄고 매출 타격은 불가피했다.
‘찜통 상가’는 안국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올해 기준 서울 지하철 1~8호선 281개 역사 가운데 51곳(지상 25곳·지하 26곳)이 비냉방 역사다. 대부분 건설된 지 오래돼 구조적으로 냉방 시설을 설치하기 어렵거나 대규모 개량 공사에 큰 비용이 들어 엄두를 못 내는 곳들이다.
역사 안에서 영업하는 상인들은 이런 고충을 안고 여름을 그저 버티고 있다. 지하 역사 안에 냉방설비를 갖출 공간도 부족하고, 막대한 공사비를 상인들이 나눠 내야 하는 부담이 있다고 호소했다.

이날 헤럴드경제가 찾은 다른 비냉방 역사 내 상인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구로디지털단지역 내 의류 매장 점주 이모 씨는 “계산대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죽을 맛이다. 물건 진열하러 잠깐만 걸어도 땀이 줄줄 흐른다”며 “매장 안이 워낙 더우니 사람들도 잘 오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음식을 조리해 파는 가게들은 상황이 더 나쁘다. 조리 기기가 뿜어대는 열기까지 버텨야 한다. 2호선 양천구청역 한 제과점에서는 직원들이 얼굴에 땀을 흘리며 갓 구운 빵을 진열하고 있었다. 창문이 없는 개방형 매장 안에는 산업용 냉방기 한 대가 놓여 있었다. 한 여성 직원은 이동할 때마다 냉방기 호스에 손을 대며 더위를 식혔다.
제과점 직원은 “에어컨은 구조상 설치가 어렵다고 들었다”며 “갓 만든 빵에서 나오는 열기가 워낙 강해 냉방기를 켜놔도 잠깐 시원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냉방기를 빵 쪽으로 향하게 하면 빵이 금방 식어버려 마음대로 사용할 수도 없다”고 덧붙였다.

대림역에서는 승강장에 내리자마자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역사 안 떡집은 천장형 에어컨과 선풍기 두 대를 가동하고 있었지만 사방이 열린 구조 탓에 시원함을 느끼기 어려웠다. 선풍기 한 대는 사람 대신 떡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진열대를 향하고 있었다.
인근 주전부리를 파는 매장은 옥수수를 삶는 대형 가마솥과 땅콩 빵 기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매장 안이 바깥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다. 민소매 차림으로 근무하던 직원 이미옥(60) 씨는 “천장에서 에어컨이 나오긴 하지만 사방에서 열이 올라와 전혀 시원하지 않다”며 “안 그래도 날씨가 더운데 가마솥과 기계 열기까지 더해져 정말 죽겠다”고 말했다.
4호선 동작역에 있는 전통 과자 판매점. 냉방기는 없었고 선풍기 세 대 가운데 한 대는 고장 난 상태였다. 옥수수를 찌는 솥과 만주 기계가 매장 공기를 달궜다. 직원은 얼음물을 마시고 부채질을 하면서도 연신 땀을 닦아냈다. 올해부터 이곳에서 근무 중인 이계숙(67) 씨는 “에어컨이나 냉방기를 둘 공간이 없어 선풍기에만 의존하고 있다”며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나 얼굴 꼴이 말이 아니다”고 고개를 저었다.
역사 내 상인들이 충분한 냉방시설을 마련하지 못하는 데에는 역사 구조와 비용 문제가 있다. 비냉방 역사 전체에 냉방시설을 갖추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지어진 지 수십년이 지난 노후 역사는 공조설비를 전면 개량하는 대규모 리모델링을 벌여야 한다.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이렇게 해서 역 한 곳에 냉방설비를 갖추는 데 약 600억원이 필요하다.
구로디지털단지역에서 3년째 의류 매장을 운영하는 이모 씨는 천장에 설치된 에어컨을 가리키며 “내가 왔을 때부터 작동하지 않았다”며 “수리 비용도 적지 않고 다른 냉방시설도 전부 상인 부담인데 몇백만원 수준이 아니다. 계산대 앞에 있는 냉방기도 본사에서 마련해준 것”이라고 호소했다.
충무로역 의류 매장 직원 이모(47) 씨도 “냉풍기를 설치할 때도 역에 허가받는 과정이 복잡하고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전력양에도 제한이 있는 것으로 안다”며 “지난해 여름이 워낙 더워 냉방기를 2대로 늘렸지만 설치 개수에 제한이 있어 올해는 별다른 대안이 없다”고 했다.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지상 역사는 개방돼 있어 냉방 효율이 낮고 지하 역사는 공조설비 전체를 뜯어고쳐야 한다”며 “개별 상가에는 실외기를 설치하지 않아도 되는 수랭식 에어컨을 권고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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