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반도체 속도전 그 너머

이길성 기자 2026. 7. 15.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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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미래 없다’던 절박감
AI발 메모리 순풍에 사라져
中추격·하청신세 그대로인데
호황에 취한 한국이 위태롭다
지난 10일 오후 충북 음성 반도체고등학교에서 열린 입시 설명회에서 많은 중학생과 학부모들이 참석, 학교 관계자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다. /신현종 기자

한국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에 다 따라잡혔다” “미래가 없다”며 비명을 지르던 처지였다. 한 대기업 최고경영자는 “나도 은퇴하면 중국인 발마사지를 해주고 살아야 할지 모른다”고 했다. SK그룹 최태원 회장은 “한국 제조업의 지난 10년은 잃어버린 시간이었다”며 “AI로 완전히 뜯어고치지 못하면 10년 뒤 주력 기업 대부분이 흔적도 없이 도태될 것”이라고 했다. “미국의 무자비한 중국 견제와 지정학적 디커플링이 한국을 연명시키고 있을 뿐”이라는 한 삼성전자 퇴임 임원의 말은 우리 산업 현실에 대한 가감 없는 진단이었다.

그게 불과 1년 안팎 전의 일이다. 메모리는 중국에 턱밑까지 쫓기고 파운드리는 대만 TSMC와 격차가 갈수록 벌어졌다. 그런데 AI발 메모리 수요 폭발이라는 뜻밖의 순풍에 절박감이 사라진 듯하다. HBM(고대역폭메모리)은 10년 투자가 만든 결실이지만 그것이 파운드리의 열세도, 중국의 추격도 해결해준 건 아니다. 변한 게 없는데 온 나라가 문제가 다 풀린 양 취해 있는 모양새다.

‘잃어버린 10년’을 경고했던 최태원 회장은 1년 만에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SK하이닉스가 나스닥 ADR 상장에 성공한 날 그는 현지 인터뷰에서 “생산 능력을 두 배로 늘리겠다고 했는데도 모든 고객이 부족하다고 말한다”고 했다. 그 고백은 반도체 호황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소수의 글로벌 빅테크가 짜놓은 판 위의 하청 신세라는 점, 지금은 갑 같은 ‘수퍼을’이지만 그들이 판을 바꾸면 언제든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정부는 호황의 과실을 미래를 위해 쓰겠다며 미래대응 기금을 만든다고 한다. 재원은 반도체 추가 세수다. 호황이 끝나면 함께 증발하는 구조다. 기우가 아니다. 직전 불황기에 반도체 수출은 15개월 연속 뒷걸음쳤고 법인세는 2년 만에 40% 쪼그라들었다. 반도체가 수출의 40%를 넘나드는 지금, 다음 하강의 충격은 더 클 것이다. 관련 부처가 앞다퉈 반도체 부지를 닦고 송전탑을 세우는 하드웨어 구축을 약속하지만, 규제 혁신 같은 소프트웨어와 바이오·양자·차세대 모빌리티 같은 대안 엔진들은 반도체 속도전의 그늘 속에 로드맵조차 흐릿하다.

문제의 뿌리는 더 깊다. ‘반도체 그다음’을 상상하고 새판을 짤 인재를 기업과 교육 현장은 길러내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차세대 사장 후보들을 교육하는 사내 과정에 참여한 한 공대 교수는 매 기수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 교육생들은 삼성의 미래를 짊어질 부사장급 인재들이다. 대답은 한결같다. “사장이 되고 싶다.” 승진이 아니라 어떤 도전을 하고 싶냐고 고쳐 물으면 “생각해보지 못했다”는 답이 돌아온다.

서울대 공대에서 A+를 받는 검증된 비결은 ‘교수의 농담까지 받아 적어 외우는 것’이라는 연구마저 나와 있다. 과학고와 영재고에서 수월성 교육을 받고 온 학생들이 흥미를 잃고 범재로 졸업한다. 남이 찾아놓은 정답을 누가 더 빨리 외우느냐로 평가하는 시스템에서 정답이 없는 시대의 문제를 풀어낼 리더가 나올 리 없다. 그렇게 길러진 인재가 기업에 가면 “미래는 잘 모르겠지만 사장이 되고 싶다”고 하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어떤 산업적 격변이 와도 그 파도에 올라탈 수 있는 국가의 기초 체력은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는 인재와 그들의 무수한 실패를 받아주는 시스템에서 나온다. 준공식도 없고 선거 때 표도 안 되는 것들이지만 주력 산업 사이클이 꺼진 다음 국가가 기댈 유일한 자산이다. 중국의 추월을 두려워하던 그 절박함마저 얕아진 지금, 우리의 호황은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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