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31일 간 하루도 못 쉬었다… '헌신짝' 된 쿠팡 하청 표준계약서

강지수 2026. 7. 15.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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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팡 배송 기사인 신원석(42)씨는 4년째 대구 아파트 단지를 돌며 물품을 배달한다. 그는 쿠팡의 택배 자회사 쿠팡로지스틱스(CLS)와 하청 계약을 맺은 대리점 소속 '퀵플렉스' 기사다.

14일 노동계에 따르면 쿠팡 배송 기사 1,500여 명이 속한 한국노총 전국택배산업노조는 15일 택배 정책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에 'CLS 대리점 13곳의 생활물류법 위반 실태' 관련 진정서를 제출한다.

예컨대 대리점 A사가 지난달 1일 배달기사와 계약하며 별첨한 '부속합의서'에는 "배송구역(라우트), 물량, 거래처, 근무일정 또는 업무범위를 분할·통합·변경·재배정할 수 있다"는 조항이 명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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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 생활물류법 무력화한 '부속 합의'
대리점 "타인 ID로 7일 이상 근무 가능"
배송구역 목줄 삼아 극한 노동 내몰아
한국노총, 15일 국토부에 진정서 접수
원청 CLS "대리점에 법령 준수 요구"
지난해 11월 24일 서울 서초구 쿠팡로지스틱스서비스 본사 앞에서 한국노총 전국택배산업본부 조합원들이 택배기사 과로방지와 정당한 배송단가 인상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최주연 기자

쿠팡 배송 기사인 신원석(42)씨는 4년째 대구 아파트 단지를 돌며 물품을 배달한다. 그는 쿠팡의 택배 자회사 쿠팡로지스틱스(CLS)와 하청 계약을 맺은 대리점 소속 '퀵플렉스' 기사다. 그가 속한 대리점 측은 올해 5월 "표준규격계약서를 써야 한다"며 그에게 서명하라고 했다. 쿠팡 기사 과로사가 문제가 되자 국회가 개정 생활물류서비스발전법(생활물류법)을 통과시켜 정부가 마련한 표준계약서 사용을 지난달 의무화했기 때문이다. 모든 택배기사는 법상 근로자가 아닌 특수형태고용직이라 근로계약서 대신 위수탁 표준계약서를 쓰지만 계약서 조항이 천차만별이라 모범 서식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신씨는 끝내 서명하지 않았다. 계약서상 신씨의 벌이로 직결되는 배송 수수료(단가)가 이전보다 줄었지만 명확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물량이 늘어났으니 단가 인하가 벌이를 해치지 않는다는 말은 모순"이라며 "6시간 일하고 벌 돈을 12시간 일해야 받는 셈이라 근무 환경은 후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생활물류법이 시행된 지 한 달이 됐지만 현장에선 '무늬만 표준계약서'라는 하소연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의무화된 새 계약서를 빌미로 한 단가 인하, 배송 품질 미달에 따른 배송 구역 회수 압박은 물론이고, 백업(대체) 기사 부족으로 한 달 넘게 하루도 못 쉬고 일하는 기사들도 여전히 있다는 주장이다.

14일 노동계에 따르면 쿠팡 배송 기사 1,500여 명이 속한 한국노총 전국택배산업노조는 15일 택배 정책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에 'CLS 대리점 13곳의 생활물류법 위반 실태' 관련 진정서를 제출한다. 택배 위수탁 표준계약서가 의무화한 뒤에도 초장기 근무 압박, 불법 재하도급 행위 등을 고발하는 취지다. 노조는 "국토부가 즉각 CLS 대리점을 전수조사하고 행정조치해야 한다"며 "영업점과 계약을 맺어 관리 책임 있는 원청 CLS도 연대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쿠팡의 하청 노동자인 퀵플렉스 기사는 전국 2만3,000여 명으로, 쿠팡이 직고용한 배달기사인 '쿠팡맨'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쿠팡 기사의 60~70% 수준이다.

한 쿠팡로지스틱스 대리점 측이 쿠팡 퀵플렉스 기사에게 보낸 내용증명 내용. 제보 문건 발췌

한국일보가 입수한 진정서와 첨부 서류 내용, 제보 기사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들이 꼽는 문제점은 ①신씨 사례처럼 새 계약서를 빌미로 한 단가 인하 통보가 대표적이다. 신씨는 건당 배송 수수료를 620원에서 580원으로 낮춘다는 통지를 대리점으로부터 받았지만 합당한 이유를 듣지 못했다. 40원 차이지만 한 달 배송량이 1만2,000건 전후로 유지돼 월 48만 원의 수입이 줄어드는 셈이다. 신씨가 계약서 서명을 거부하자 대리점은 지난달 3일 법 시행 직전 "계약서를 쓰지 않으면 계약을 해지하겠다"는 내용증명을 보냈다. 노조 도움을 받고서야 지방노동위원회 조정을 거쳐 배송 단가는 30원이 오른 650원으로 정해졌다.

과로사의 주범으로 꼽혔던 '클렌징(배송 구역 회수)' 조항을 사실상 포함한 계약서를 내민 대리점도 있었다. 클렌징은 배송 실적이 기준에 못 미치는 기사에게서 담당 구역을 빼앗는 관행으로, 기사들을 쉬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지목돼 왔다. 예컨대 대리점 A사가 지난달 1일 배달기사와 계약하며 별첨한 '부속합의서'에는 "배송구역(라우트), 물량, 거래처, 근무일정 또는 업무범위를 분할·통합·변경·재배정할 수 있다"는 조항이 명시돼 있다. 조건은 '고객 서비스 품질 유지, 고객 불만 반복, 배송품질 저하' 등으로 적혔다. 기사들이 정시 배송에 압박을 느껴 극한 노동에 내몰린다는 지적에 따라 개정된 법이 이면 계약으로 무력화되는 셈이다.

쿠팡로지스틱스 대리점이 지난달 1일 자사 소속 쿠팡 퀵플렉스 기사에게 보낸 표준계약서 부속합의서 내용. 문서 발췌

"백업 기사 없다며... 한 달 내내 일했다"

②초장기 연속근무 문제도 있다. 주 6일 최장 60시간 근무를 권고하는 법과 달리 노조에 "연속 7일 이상 일했다"고 실명 제보한 기사만 20여 명이다. 대리점 한 곳은 올해 5월 말 기준으로 소속 기사들이 9~31일 연속근무했다. 야간 배송 기사가 최대 석달 연속근무했다는 증언도 있다. 쿠팡 배송 기사의 업무 시스템은 연속 근무일이 7일이 되는 순간 로그인이 막히는 터라 '위장 로그인'을 해야 했다. 한 기사는 "31일간 매일 일했고 6일 연속 근무가 끝나면 아내 등 타인 아이디로 일했다"며 "회사에서 백업 인력이 부족하다며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대응했다"고 토로했다.

이에 대해 대리점 B사 대표는 "주 6일 근무 후 2일 휴무 조 편성표를 철저히 운영 중"이라며 "사측이 강제로 연속 근무를 지시하거나 압박한 사실은 전혀 없다"고 반박했다. 이어 "배송 기사들이 경조사나 휴가 등 개인 사정으로 동료 기사와 자율적으로 휴무일을 맞바꾸는 과정에서 특정 주간에 근무일이 몰린 실무상의 착시 현상"이라고 했다.

기사 400명을 둔 영업점에선 소속 기사 2명이 5월 말부터 40일 넘게 연속 근무하기도 했다. 이 곳의 관리자급 팀장은 소속 기사와의 통화에서 "근무표엔 휴무로 명목상 적어두고 백업 기사의 아이디로 일을 할 수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병원 치료를 위해 2주 이상 쉬겠다고 말한 동료에게 대리점이 '일주일 이상 못 기다린다'며 사실상 퇴사를 종용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한 쿠팡 퀵플레스 배송기사가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기사와 직접 관련 없음. 한국일보 자료사진

원청 CLS 책임 어디까지?... "법령 준수 요구"

택배 물량을 주는 '원청' CLS가 보다 적극적으로 대리점을 감독해야 한다는 게 노조 입장이다. 노조 관계자는 "대리점 실태를 담은 공문을 CLS에 보냈지만 회답이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일각에선 대리점의 행태 하나하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는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한 물류업계 관계자는 "대리점들이 원청의 영업 간섭 행위라고 반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CLS 관계자는 "CLS는 영업점과 체결한 계약서에 영업점의 법령준수 의무를 부과하고 있고, 영업점을 대상으로 법령을 준수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강지수 기자 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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