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클러스터, 정부·기업의 ‘위험·비용 분담’ 공조 체계로 판 짜야[류영재의 제3의 자본주의]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2026. 7. 14. 20:2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800조원 규모의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투자를 둘러싼 기업 거버넌스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청와대에서 이재용·최태원 회장이 이를 발표하자 곧바로 ‘이사회 패싱’과 ‘정부 압력’ 공방이 뒤따랐다. 이사회 결의를 건너뛴 절차상 문제뿐 아니라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등기이사도 아닌 두 회장이 의사결정의 주체로서 회사를 대표할 수 있느냐는 비판도 제기됐다.

주주 자본주의자들이 의당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이다. 기업은 오롯이 주주 이익 극대화를 위한 결사체이고, 따라서 주주의 대리인인 이사회가 중대 의사결정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다. 일부는 타당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한국적 맥락과 오늘의 반도체 산업 현실과 유리된 형식론에 가깝다.

우선 ‘이사회 패싱’ 논란은 최종 의사결정권자인 두 회장이 각사의 등기이사로 복귀해 권한에 상응하는 책임을 함께 지는 것으로 풀어야 한다. 그동안 대다수 회장들은 그룹과 계열사들의 전략·인사·투자를 실질적으로 좌우하면서도 공시, 감시, 민사책임 등 법적 부담을 비켜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제 그 권한만큼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권한과 책임의 비례성 원칙에 부합한다.

반면 이사회 중심 경영의 현실적 제약도 직시해야 한다. 국내 상장사에서 이사회가 큰 방향과 전략을 주도적으로 제기하고 심의·결정한 사례는 드물다. 사외이사 상당수는 기업 경영 경험이 충분치 않은 교수, 관료, 법조인 출신들로 채워져 있고, 안건은 이사회 소집 며칠 전에야 공유된다. 이런 상황에서 메가프로젝트급 투자안건까지 이사회가 주도한다면, 의사결정 지연과 왜곡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그 결과는 고스란히 주주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해답은 이미 나와 있다. 사외이사 선임 방식부터 바꿔야 한다. 사외이사 추천위원회가 중장기 전략에 필요한 전문성 매트릭스를 제시하고, 공개모집, 소수주주 추천 등을 통해 후보군을 넓혀야 한다. 여기에 후보자의 전문성, 독립성, 이해상충 정보를 충분히 공시하고, 집중투표와 감사위원 분리선출로 소수주주의 실질적 선택권까지 보장한다면 ‘거수기 이사회’의 오명을 벗을 수 있다.

이사회 운영 방식도 손질해야 한다. 필자는 ‘수프라 최고경영진(Supra Top Management Team)’ 모델을 제안한다. 대표이사, 핵심 사업부·전략·재무 책임자, 사외이사가 참여하는 상설 협의체를 두고, 중장기 전략과 초대형 투자안을 이사회 상정 이전부터 검토·조율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사외이사는 정보 비대칭의 벽을 낮춘 상태에서 질문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고, 이사회는 경영진 구상을 추인하는 형식적 자리가 아니라 책임 있는 의사결정의 장으로 진화할 수 있다.

이제 ‘정부 압력’ 논란을 보자. 이 문제는 ‘시장 대 국가’라는 낡은 이분법으로 보면 사안이 왜곡된다. 정부가 특정 지역 투자를 강요해 주주에게 부담을 전가할 수 있다는 우려에는 분명 경청할 부분이 있다. 그러나 반도체를 둘러싼 국가별 각축전, 호남의 재생에너지 잠재력, 지역균형 발전, 지정학적 리스크 분산이라는 주장 역시 가볍게 흘려보낼 수 없다.

무엇보다 반도체는 수출 주력 품목에만 머물지 않는다. 경제안보와 기술주권, 미래 첨단산업의 핵심이다. 미국·유럽·일본·대만이 재정, 세제, 규제, 인력, 인프라 패키지를 총동원해 자국 반도체 생태계를 키우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현실 앞에서 “시장과 이사회에 맡기고 정부는 물러나라”라는 주장은 한가할뿐더러 실효적 해법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부와 기업의 관계를 ‘압력과 수용’이 아니라 ‘위험과 비용의 분담’이라는 공조 체제로 재설계하는 일이다. 국가는 전력, 용수, 부지, 인력, 인프라, 규제 개선을 신속하게 제공하고, 기업은 기술과 자본, 실행 역량을 투입한다. 기업의 위험이 낮아지고 비용편익이 개선되며, 주주가치 역시 높아질 수 있다. 국가가 인프라와 규제를 맡고 기업이 혁신과 실행을 맡는 이 분업적 협력 없이는 전략산업의 경쟁력도, 국가 경제의 지속 가능한 발전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최근 일본의 기업 거버넌스 코드 개정 논의는 시사점이 있다. 한때 자본효율성과 주주환원 강화에 방점을 찍었던 일본의 거버넌스 개혁은 이제 성장 투자와 전략적 자원 배분, 이사회의 실질적 역할 강화로 축을 옮기고 있다.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논쟁 역시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이를 정부와 시장의 이분법으로 소모할 것이 아니라 전략산업에서 정부와 기업, 이사회와 경영진, 주주와 사회의 관계를 재설계할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기업 거버넌스는 정부와 기업의 이인삼각 레이스에서 성장 투자와 위험 관리, 주주가치와 국가이익을 함께 묶어내는 제3의 길 위에서 가능하다.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