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잣집 역사와 궤를 같이한 가양주 교동법주 300년

경북매일 2026. 7. 13.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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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회> 교동법주와 최씨 고택
3대 최국선, 궁궐서 술 빚는 법 익혀와 4촌·8촌 네 가문에 전수 ‘경주법주’로 회자
1960년대까지 기술 이어왔지만 최국선 계보 ‘교동법주’ 따로 ‘본파법주’로도 불려
1970년 10월 13일 향년 87세로 별세한 독립유공자 최준 부고기사 동아일보 게재
같은해 12월엔 신라토기 등 가보 100여 점·27간 소실 피해 최씨 고택 화재 알려져
최부자 3대 최국선이 궁중에서 익힌 비법으로 술을 빚기 시작한 교동법주 가옥 전경. /이용선기자

술의 발효는 술 빚기의 한 과정이다. 발효가 진행되면서 술이 세 층으로 나뉜다. 가장 맑은 위층을 떠낸 것이 청주 혹은 약주다. 밥알이 동동 떠 있는 중간층이 동동주다. 아래의 탁한 층을 걸러낸 것이 막걸리다. 
교동법주는 “먼저 술쌀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찹쌀죽을 쑤어 누룩과 배합한다. 5~10일 발효시킨 후 모주(母酒)를 만든다. 여기에 다시 쪄서 말린 찹쌀 고두밥을 배합시킨다. 그 뒤 숙성과 저장 등의 과정을 거쳐 100일 정도가 지나면 탄생한다"는 특급 발효주다. 교동법주 국가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였던 배영신 여사가 1991년(당시 74세)에 한 말씀이다. 
교동법주는 300여 년의 역사를 가졌다.

옛날의 경주법주, 지금의 교동법주를 처음 빚은 사람은 3대 최부자 최국선이었다.   
최국선은 평생 과거시험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할아버지 최진립의 후광, 즉 충신의 손자로서 벼슬살이를 잠시 했다. 그의 근무지가 궁궐의 음식을 담당하는 사옹원(司饔院)이었다. 그는 참봉(參奉)이었다. 조선시대 관리의 18품계 중 가장 마지막 단계인 종9품 관직으로, 오늘날의 9급 공무원과 비슷했다. 
최국선은 주방 실무 행정을 담당하다가 술 빚는 법을 익혔던 듯하다. 그는 늙은 어머니 봉양을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벼슬살이에 대한 미련을 끊었다. 불러도 다시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고, 더 높은 벼슬을 얻기 위한 과거 공부도 하지 않았다. 
농사에 모든 것을 바쳤다. 한데 가끔 궁중에서 맛보았던 술이 그리웠다. 그는 집안 여성들을 지휘하여 궁중에서 맛보았던 술에 버금가는 술을 빚어내는 데 성공했다. 
궁중에서 익혀온 법으로 담갔으므로, 법주(法酒)로 회자했다. 집안에서 자가 소비나 손님 접대를 위해 담그는 가양주(家釀酒)였지만 소문이 나 유명해졌다. 
최국선은 자기 직계 가문, 즉 삼공파 가문에만 법주 기술을 전수한 게 아니었다. 4촌 형님, 8촌 형님 가문에도 아낌없이 전해주었다. 그래서 경주법주 기술을 가진 가문이 넷이라는 것이었다. 네 가문 모두 1960년대까지 그 기술을 이어왔던 모양이다. 
어쨌든 네 가문 중에서도 최국선의 계보 즉 교동 가문에서 빚은 술이 가장 정통으로 대접받았다. 경주법주나 교동법주나 같은 술 아냐? 뭐가 달라? 술맛의 차이는 술맛에 조예가 깊지 못한 필자가 감히 아는 척할 바가 아니다.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경주법주는 여전히 이조리에 기반을 둔 최진립을 파조로 모시는 세 가문에서 전승되어온 술이다. 교동법주는 교동으로 이주한 최국선의 직계인 교동 가문에서 빚어온 술이다. 그래서 교동법주를 따로 ‘본파법주’라고도 부른다. 

300년 역사의 가양주 전통을 간직한 경주 교동법주 가옥 내부. /이용선 기자
국가무형문화재 제86-3호로 지정된 경주 교동법주의 고풍스러운 외관. /이용선기자
교동법주 제조 시연행사 모습. /이용선기자

현재 교촌마을에 있는, 최씨 고택 바로 옆에 위치한 교동법주 가옥이 그 교동법주 빚는 곳인가? 맞다. 교동법주를 빚고 판매도 하는 곳 맞다. 
1960년대에는 정부의 양곡관리 정책과 가양주 제조 규제로 인해 교촌마을에서 술을 빚을 수 없었다. 1991년부터 교촌마을 현 가옥에 제조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이 술 문제가 좀 복잡하고 예민하다. 14대 주손 최염은 선을 긋고 있다. “(교동법주의) 술 역시 우리집 고유의 비법으로 담은 술은 아니다. 이 술은 우리 친척이 만든 술로서 우리 집 술과 비슷하게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면서 “특허청에 따로 ‘교촌법주’란 이름으로 상표등록을 해놓았다"고 한다.
아무튼 1963년경에는 정부에서 지정한 교촌 바깥 어느 술도가에서 발효되고 있었다. “쌀과 잡곡을 반반씩 섞어야 하는 원료 때문에 술맛은 도무지 ‘입에 쩍쩍 붙었던’ 옛것을 찾지 못하고 있”었고, “주세법에 묶여 경주 밖으로는 내보내지 못했다."    
최식은 12대 최준의 장남이었다. 즉 13대 주손이다. 14대 최염의 부친이다. 최식이 다닌 게이오대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설립한 게이오기주쿠 대학으로 조선의 엘리트 유학생들이 다수 다녀왔다. 최식은 인터뷰에서 자기 아버지 대에서 만석꾼이 끝난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 자신은 만석꾼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랬던 모양이다. 
조덕송 기자는 애처롭게 썼다. “지금은 조상이 물려준 아흔아홉 칸짜리 가택 하나 유지하는 데도 힘이 겨워 숨이 찬다고, 만석꾼의 후예는 법주와 가문을 회상하면서 낙조의 빛을 띠었다. 법주가 무슨 신라의 낭만과 역사를 같이하는 그런 것인 줄 짐작하였던 마음에 우선 약간의 실망이 간다.”
지금도 ‘경주법주’라는 말을 듣는다면, 신라 왕실에서 빚었던 술이잖아, 오해할 독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조덕송 기자도 그런 줄 알았는데 한 집안에서 출발한 술이라니 좀 실망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많은 독자가 깜짝 놀랐고 궁금증이 생겼을 테다. 
이 집안 뭐지? “한 200년 전부터” 경주법주를 빚어왔고, “일제 때까지만 해도 1년에 술쌀이 찹쌀로 300석 든 해가 있었고, 하루 100여 명의 손님을 치렀다"는 최씨 가문. 호기심이 생겼을 것이다. 기자는 석굴암으로 가버리면서 더는 최씨 가문의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는다.

1970년 동아일보 사사를 증정받으며 마지막 공식 행보를 남긴 문파 최준 선생. /김종광 작가가 ChatGPT로 생성한 이미지

위 기사가 나가고 7년 뒤였다. 1970년 4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단신기사다. 헤드라인이 이랬다. “본보 창간 발기인의 1인 최준 씨에 본사서 기념품”. 
기사 본문이다. “최준 씨(87세· 경주시 교리 69) 10일 오전 본사를 방문, 김상만 부사장은 기념품과 창간 50주년 기념간행물을 증정했다.”
이것이 최준의 마지막 공식 행보였던 듯하다. 
최준은 1970년 10월 13일, 향년 87세로 별세하였다. 
이틀 뒤 최준의 부고기사가 10월 15일자 동아일보에 실렸다. 헤드라인과 기사다. 
“동아일보 창간 발기인 문파(文坡) 최준 최옹 별세. 동아일보 창간 발기인의 한 분이며, 전 대구대학(현 영남대) 설립자인 문파 최준 옹이 노환으로 이곳 교동 57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87세. 영결식은 오는 20일 오전 10시. 장지는 경북 월성군 내남면 월산리.” 
최준의 호는 ‘문(文)파’가 아니고 ‘문(汶)파’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언론들은 거의 ‘문(文)파’로 썼다. 문파 최준의 빛나는 삶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세히 이야기할 것이다.

1672년 최국선을 사옹원 참봉으로 임명하는 교첩. / 한국고문서자료관, 용산서원

1970년 11월 16일자 동아일보에는 ‘민속자료 지정 위해 이조 고가 조사’라는 기사가 실렸다. “(조선시대)중기에 지어진 중류 민가 아홉 채가 한국주택사를 대변하는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기 위해 문화재전문위원들에 의해 조사보고 되었다.”
여기에 최씨 고택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현 소유자 최준 씨의 5대조가 월성의 속칭 개무덤(이조리)에서 살다가 요석궁터(요석궁지)라 해서 이곳에 터를 잡아지은 집이라 한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두 개의 사랑채가 눈에 들어오고 문간채 고방채 안채 사당채 등의 한국 재래의 고가옥 구조를 제대로 갖춘 집이다.”
최준의 생전 조사 결과가 사후에 발표된 것이다.

최부잣집 이야기가 신문 전면에 등장한 것은 얄궃게도 화재의 순간이었다. 위 기사가 나가고, 불과 닷새 뒤였다.  
1970년 11월 22일 오전 10시 20분쯤. “우리나라 대표적 가옥의 모형으로 정부가 고건물 양식물로 지정한 경주시 교동 최식(64) 씨 집(통칭 최부잣집)에 불이 나 1시간 만에 47간 중 27간이 소실됐다. 최씨가 소장했던 신라토기 등 약 100여 점의 가보가 탄 것으로 보아 1000여만 원의 피해를 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으로 치면 최소 수십 억 원의 피해였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문화재적 가치를 생각해보라. 너무 큰 상실이다.
7년 전 최식은 인터뷰에서 “아흔아홉 칸짜리 가택 하나 유지하기도 힘겹다"고 말했었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방앗간, 외양간 등 많은 건물이 뜯기고 47칸만이 남아 있었다"고 했다. 문화재급 마을이었지만, 재건운동(1960년대 새마을운동과 비슷했던 농촌바꾸기운동)의 폭풍을 못 이겼던 듯하다. 이날 화재로 그나마 남아있던 47칸 중 “스무 칸이 소실된 것”이었다. 
신문에는 “불탄 최부잣집”이란 설명이 붙은 사진도 보인다. 흐릿하지만 화재의 흔적이 생생하다. 상복을 입은 듯한 사람이 망연자실하고 있다. 그가 최식인지 혹은 최염인지 또 다른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막막한 슬픔이 전해져오는 듯하다. 
화재가 나기 한 달 전 1970년 10월 13일에, 12대 최부자 최준이 타계했다. 이름난 양반 가움은 3년 혹은 1년 동안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살아계실 때와 똑같이 상식(밥과 국)을 차려 올리며 곡을 하는 것이 예법이었다. 많이 줄었다고 해도 49일(불교의 탈상 기준)이나 100일까지는 상복을 입고 상식을 올리기도 했다. 그래서 화재 사진에 나오는 이는 상복 차림처럼 보인다. 
아울러 기자가 최식을 인터뷰하고 정리한 기사가 실렸다.

기자는 직접 보았던 것처럼 썼다. “최부잣집은 영남 일대에서 모르는 이가 드물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약간 편집했다.
“2900평의 대지에 구중궁궐처럼 늘어섰던 기와집은 마치 한 마을 같이 컸다. 집 주위는 경치가 아름다워 예부터 찾는 이가 많았다. 가장 오래된 일로는 의친왕이 궁녀 5, 6명을 데리고 들른 것이다. 의친왕은 사랑방에서 1주일 동안을 묵고 갔다. 해방 후엔 주한 미국대사, 인촌 김성수, 전 국방부장관 신성모도 며칠씩 묵고 갔다.” 
그래서 1968년 10월 경주시교육청이 최부잣집을 문화재로 지정할 것을 중앙정부에 건의했다. 경주시는 집 주위 일대를 3개년 계획으로 ‘신라촌’이란 관광지로 개발 중이었다.  

기자는 이 대단한 “집은 약 200년 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언제 누구의 설계에 따라 지은 것인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채 최씨 집안이 6대째 살아왔다"고 했다. 

다행히 그동안 최씨 고택에서 다량의 문서가 발굴되었다.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최씨 고택이 지어지던 때 이야기를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  

/김종광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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