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의 공주 시절을 아시나요”···백제 고도에서 만난 다섯 종교


짙은 회색 돌판에는 이름들이 빼곡했다. 박바울로(45세) 삽다리인, 고선양(65세)과 장남(25세) 및 차남(22세), 맏며느리(25세)와 막내며느리(21세). 이름과 나이, 가족관계가 또렷이 남은 이들이 있는가 하면 한쪽에는 박서방, 신서방, 장서방, 최서방이라는 호칭만 남은 이들도 있었다. 충남 공주 황새바위 순교터 무덤 경당 지하의 석판엔 한 시대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후기 천주교 박해가 극심하던 시절, 이곳에서는 수백명의 신자가 신앙을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지난 8일 찾은 황새바위 순교터에는 굵은 비가 쏟아졌다. 돌계단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나타나는 좁은 석문. 이를 통과하면 잔디가 깔린 작은 광장을 둘러싼 무덤 경당과 순교탑, 12명의 사도를 상징하는 빛돌이 세워져 있다. 황새바위는 소나무 군락이 있어 예로부터 황새가 많이 서식했던 언덕 일대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김성태 신부(내포교회사연구소장)는 “박해가 심하던 19세기 중기에 파악된 신자만 약 3000명이었고 그 중 50%가 충청도 사람이었다”면서 “황새바위 인근에 있던 공주향옥(鄕獄)에서 옥사하거나 황새바위에서 참수당했다”고 설명했다. 황새바위의 기억은 조선 후기 박해의 시간에만 머물지 않는다. 김 신부의 설명에 따르면 공주향옥은 일제강점기 시절 형무소였고 1970년대까지 교도소로 쓰이다 이후 외곽으로 이전했다. 정의구현사제단 활동으로 한때 이곳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함세웅 신부는 황새바위를 바라보며 순교자들을 떠올렸고, 훗날 성지 조성에도 힘을 보태기도 했다.

무덤 경당 옆에 세워진 예수상 뒤편으로는 언덕길이 이어진다. 길은 공산성 안에 있는 사찰 영은사 쪽으로 통한다. 한 종교의 성지가 다른 종교 유산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공주시는 지난달 왕도심(원도심)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종교 유산을 연결하는 ‘공주 이음길’ 개통식을 가졌다. 불교·천주교·개신교·동학·유교를 상징하는 장소들이 작은 도시 안에서 이어지는, 서로 다른 믿음의 흔적을 잇는 길이다.
공주는 흔히 백제 고도로 기억된다. 공산성과 무령왕릉 같은 세계유산 옆으로 조금만 걸음을 옳기면, 다른 층위의 종교사가 곳곳에 겹쳐져 있다. 웅진백제 최초의 사찰 대통사지의 당간지주(절의 위치를 알리는 돌기둥)와 영은사, 중동성당과 황새바위, 공주제일교회와 선교사가옥 및 영명중고등학교, 동학농민군의 시신이 쌓였던 비극의 터 송장배미, 삼국사기에 최초로 기록된 효자 향덕을 기리는 효심공원과 공주향교 등이 5㎞ 남짓한 한 동선 안에 놓여 있다.
이 중 공주제일교회와 영명중고등학교는 유관순 열사의 유년시절을 보여주는 장소다. 흔히 유관순 하면 고향 천안과 서울 이화학당을 떠올리지만 그의 성장 과정에 공주도 빼놓을 수 없다. 캐나다 출신 선교사 사애리시는 천안 목천면의 작은 교회에서 만난 소녀 유관순을 공주 영명여학교에서 공부하도록 주선하면서 딸처럼 보살폈다. 1914년부터 1916년까지 이곳에서 공부하고 공주제일교회에 다녔던 유관순 열사의 흔적들 속에서 근대 교육과 신앙이 어떻게 독립운동 정신으로 이어졌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공주제일교회 박물관에는 공주 개신교 초기 역사나 유관순 관련 자료들이 있고 영명중고등학교 안에는 유관순을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유관순을 중심으로 한 개신교 유적 코스를 오랫동안 해설·안내해 온 박보영 공주제일교회 기독교박물관 부관장은 “연간 2만명가량의 방문객이 이곳을 찾는데 유관순 열사와 공주의 인연을 모르고 왔다가 감동을 받는 분이 많다”고 말했다.

이음길은 우금티 전적비가 있는 외곽으로도 이어진다. 우금티는 1894년 동학농민군이 관군·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크게 패한 곳이다. 이후 동학농민운동은 급격히 힘을 잃었다. 천주교와 개신교 유산이 박해와 교육, 독립운동의 기억을 품고 있다면 우금티는 동학이라는 사상이 정치·사회적 현실과 부딪힌 장소다. 종교를 잇는다는 이음길은 단순한 종교 탐방로를 넘어선, 여러 시대의 사건과 기억을 따라가는 길이 되는 셈이다.
이음길을 둘러보는 방식은 일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왕도심 안쪽만 본다면 황새바위에서 시작해 중동성당, 당간지주, 공주제일교회 박물관, 영명학교, 구 선교사 가옥을 묶어 걷는 코스가 무난하다. 공산성 안 영은사와 공주향교까지 더하면 반나절 답사코스로 잡을 수 있다. 우금티전적비와 송장배미는 왕도심에서 좀 떨어져 있으므로 차량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김호관 공주시 문화예술과 문화정책팀장은 “시간을 넉넉히 잡는다면 공주의 이름과 웅진의 유래가 깃든 고마나루 곰사당에서 시작해 공산성으로 이어지는 금강변 길을 함께 걸어보는 것도 추천한다”고 말했다.


공주 | 박경은 선임기자 k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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