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대의 이로운 기술, 다정한 도시] AI가 주는 ‘알 수 없음’이라는 감정워치

최근 종영한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는 '감정워치'라는 흥미로운 장치가 등장한다. 손목의 기기가 자율신경계의 반응을 읽고, 그 순간의 감정 상태를 색깔과 단어로 보여준다. 흥분, 분노, 절망, 좌절, 슬픔, 간절함처럼 이름 붙일 수 있는 감정은 화면 위에 곧바로 표시된다. 그런데 어떤 순간, 감정워치는 더 이상 감정을 해석하지 못하고 '알 수 없음'이라고 말한다. 그 장면이 오래 남는 이유는 우리도 비슷한 감정을 종종 겪기 때문이다. 분명히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데, 그것을' 불안'이라고만 부르기에는 부족하고, '두려움'이라고만 하기에는 너무 좁으며, '경이로움'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서늘한 감정이다. 마음속 낯선 이물감이 느껴지는데, 아직 그 감정에 붙여줄 정확한 이름을 찾지 못한 상태이기도 하다.
생성형 인공지능을 사용하면서도 종종 이런 이질감을 느낀다. 편리하다는 말도, 놀랍다는 말도 부족하다. 두렵다고 하기에는 매일 자주 쓰고, 즐겁다고 하기에는 마음 한편이 서걱거린다. AI는 우리의 일을 도와주지만, 동시에 우리가 일해 온 방식과 감각을 흔든다.
첫 번째 이질감은 질문하는 태도에서 발견된다. 예전에는 질문은 질문하는 사람의 수준을 보여준다고 믿었다. 아는 만큼 질문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인공지능 앞에서 우리는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과감하게 질문한다. 심지어 무엇을 질문해야 할지도 인공지능에게 묻는다. 질문의 문턱이 낮아진 것은 해방이지만, 동시에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에 대한 감각도 흐려진다. 지식이란 무엇인가. 내 글의 어디까지가 내 사유이고, 어디부터가 기계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외삽된 것인가. 그 경계가 흐릿해지는 순간, 마음이 어지러워진다.
두 번째는 협력의 마찰이 사라지는 경험이다. 아담 스미스 이래 자본주의의 역사는 분업의 역사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일을 나누고, 설명하고, 설득하고, 조율해야 한다. 그 과정에는 커뮤니케이션 비용, 갈등 비용, 기다림의 비용이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과 일하면 이 마찰 비용이 '0'에 가까워진다. 기획, 자료 조사, 분석, 초안, 검토가 한 사람의 손안으로 들어온다. 분업의 감각은 약해지고, 통합의 감각은 강해진다. 일은 빨라지지만, 함께 일한다는 감각은 옅어진다.
세 번째 이질감은 노동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경험이다. 예전에는 데이터에서 인사이트를 얻기 위해 긴 시간과 숙련이 필요했다. 통계 프로그램을 돌리고, 결과를 해석하고, 기획서를 쓰고 다듬는 일에도 많은 노동이 들어갔다. 이제는 인공지능에게 몇 번의 요청만으로 회귀분석과 예측모형의 방향을 잡고, 보고서의 뼈대를 세우며,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가상의 검토자들을 불러 자신의 논문을 점검할 수 있다. 놀라운 일이다. 동시에 쓸쓸한 일이다. '일의 가치는 투입한 노동량에 비례한다'라고 믿어왔던 오래된 감각이 흔들린다. 설거지하는 시간보다 정제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예측모형을 만드는 시간이 더 짧아지는 순간, 수십 년간 숙련을 쌓아온 몸의 기억은 허망함을 느낀다. 감탄, 경이, 불안, 슬픔, 소외감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이 낯섦은 단순한 기술 적응의 문제가 아니다. 자기 능력과 기계의 능력, 인간의 경험과 자동화된 결과 사이의 관계를 다시 해석해야 하는 감정의 사건이다. 그런데 이 감정은 아직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이름을 얻지 못했다. 이름이 없으면 설명하기 어렵고, 설명되지 않으면 개인의 문제로 고립되기 쉽다. "나만 이상한가?"라는 감각은 사람을 조용히 움츠러들게 한다. 우리는 이미 비슷한 경험을 지나왔다. 코로나19를 비교적 큰 혼란 없이 건너온 것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 고립, 불안, 관계의 단절, 편 가르기, 혐오라는 집단적 상처가 남았다. 기술 변화도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빠르게 적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쪽에서는 설명되지 않은 감정들이 쌓인다. 인공지능이 주는 이러한 '알 수 없음'의 감정에도 공동체 안에서 함께 쓸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하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기술은 언제나 새로운 감각을 만들고, 익숙했던 감각을 과거로 보냈다. 비 오는 날 옥상에 있는 TV 안테나를 돌리던 손의 감각, 라디오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며 녹음 버튼을 조심스럽게 누르던 긴장, 지도책을 펼쳐 길을 찾던 기억은 어느새 잃어버린 감각이 되었다. 오늘 우리가 인공지능 앞에서 느끼는 이물감도 언젠가는 익숙한 감각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익숙해진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름을 얻지 못한 감정은 다른 방식으로 우리 안에 남는다.
드라마 속 '알 수 없음'은 하나의 신호였다. 그것은 단순한 기계 고장도, 사라지고 싶은 마음도 아니었다. 오히려 "도와줘"라는 말에 가까웠다. 인공지능이 우리에게 남기는, 이 서걱거리는 감정도 어쩌면 같은 신호일지 모른다. 더 빠른 적응을 요구하는 신호가 아니라, 서로의 감정을 묻고 함께 견디자는 신호다. 기술이 사람 사이의 인터페이스를 대체하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사람 사이의 온도를 더 의식적으로 회복하고, 다정함이라는 인간의 최후 방어선을 지켜야 한다. 다정함은 약한 말처럼 들리지만, 기술의 시대에는 가장 강한 사회적 능력이다. 낯선 감정을 혼자 견디게 하지 않는 힘, 설명되지 않는 불안을 함께 이름 붙이는 힘, 효율의 속도 속에서도 사람의 호흡을 기다리는 힘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주는 '알 수 없음' 앞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더 빠른 기계가 아니라, 서로를 향해 조금 더 다정해지는 인간의 능력이다.
Copyright © 대구일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