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70년 만에 찾은 韓 자랑스러워…돌아가도 다시 참전할 것”

현정민 기자 2026. 7. 13.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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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참전용사 테스파예 아스마마우씨
6.25 참전용사 테스파예 아스마마우씨. /현정민 기자
참전을 후회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세계적 경제·문화 강국이 된 한국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6·25전쟁 참전용사 테스파예 아스마마우(97)씨는 이렇게 말했다. 아스마마우씨는 1953년 파병 이후 70여년 만에 한국 땅을 밟았다. 허허벌판이었던 한국은 마천루와 자연이 어우러진 도시로 탈바꿈했다.

아스마마우씨는 에티오피아 ‘강뉴(Kangnew)부대’ 참전 75주년을 맞아, 후손 34명으로 결성한 강뉴합창단과 함께 방한했다. LG가 체류비를 후원한다.

에티오피아는 6·25전쟁 당시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지상군을 파병했다. 전쟁이 터진 지 약 한 달 만에 파병을 결정했다. 당시 창설된 부대가 황실 근위대를 주축으로 한 강뉴부대다.

‘강뉴’는 에티오피아어로 초전박살(初戰撲殺)이란 뜻이다. 하일레 셀라시에 에티오피아 황제는 부대 이름을 지으며 “이길 때까지 싸우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싸우라”고 했다. 강뉴부대는 6·25전쟁 참전 기간 ’253전 253승’을 거뒀다.

그러나 1974년 에티오피아에 쿠데타가 일어나고 공산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참전용사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친미 성향인 한국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반역자’로 낙인찍힌 탓이다. 재산을 몰수당하고, 사회적 차별을 견뎌야 했다.

참전 이력은 주홍 글씨가 됐기에 사진이나 기록은 대다수 소각됐다. 군정 붕괴 이후에도 후손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아스마마우씨는 6·25전쟁 참전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고 밝혔다. 다시 돌아가 선택권이 주어지더라도 참전하겠다고 했다. 아스마마우씨와 지난 9일 서울 은평한옥마을에서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72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참전 이후 첫 방한이다. 한국이 크게 발전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늘 다시 오고 싶다고 생각했다. 좋은 기회로 한국에 올 수 있어 기쁘다. 발전한 한국을 보니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지난달 22일 6·25 참전용사 테스파예 아스마마우씨는 참전용사 후손으로 구성된 '강뉴 합창단'과 함께 방한했다. 강뉴 합창단은 약 한달 간 일정을 마친 후 귀국할 예정이다. /한국전쟁참전국기념사업회 제공

─낯선 나라 한국에서 발발한 전쟁에 참전한 계기가 궁금하다.

“군인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만 22세 때 자원 입대하고, 1년간 군사훈련을 받은 뒤 파병이 결정됐다. 한국까지 여정이 녹록지 않았다. 에티오피아에서 기차를 타고 지부티까지 이동, 21일간 배를 타고 난 후에야 한국에 도착했다.

할아버지도 군인이었고, 아버지도 황실 근위대 소속이었다. 비록 6살쯤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대를 이어 군인이 돼야겠다는 의지는 확고했다. 애국심과 군인 정신은 우리 가문의 전통이다.”

─당시 한국의 모습은 어땠나.

“항구에 도착하자 굶주린 아이들이 몰려와 우리를 반겨준 기억이 난다. 언어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환대의 분위기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 고국에서 가져온 빵을 잘게 쪼개 나눠주곤 했다.

한국은 무척 황폐한 상태였다. 농경지는커녕 나무조차 몇 그루 없었다. 가축도 소 한두 마리 정도가 전부였다. 발을 뗄 때마다 진흙 바닥에 신발이 푹푹 빠져 애를 먹었다. 어려운 환경에도 여성들이 장작을 부지런히 나르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6·25전쟁 당시 에티오피아 강뉴 부대가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에티오피아한국전참전기념관 홈페이지

─1년간 근무하며 힘들었던 부분은 무엇인가

“산악 지대를 오르내리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흙이 부드러워 무거운 무기를 들고 이동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겨울을 버티는 것도 쉽지 않았다. 눈이 많이 와서 쌓이면 다리가 시려웠다. 에티오피아에도 눈이 오기는 하지만, 제형이 달랐다. 에티오피아의 눈은 얼음 조각이라면, 한국의 눈은 무르고 흘러내려 액체 같았다.

그래도 공기가 무척 맑아, 이동 후 잠깐 휴식을 취해도 재빨리 기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전장의 긴장감이 무색하리만치 공기가 좋았다.”

─에티오피아로 돌아간 뒤엔 어땠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참전용사들을 궁으로 초청해 만찬을 베풀었지만, 대대적 환영 행사는 없었다. 조용히 갔다가 조용히 돌아온 편에 더 가까웠다. 고국에 돌아와서는 지도 만드는 일을 하며 살았다.

한국에 대한 소식은 종종 들었다. 당시 함께 참전했던 친구들을 통해 한국이 선진국이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삼성전자 가전을 포함해 다양한 한국산 물건이 수입되는 걸 보면서 실감할 수 있었다. 에티오피아에서 한국산 제품은 인기가 많다.”

─6·25 참전용사에 대한 예우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다.

“군 월급 이외에 별다른 보상을 받은 적 없다. 군인으로서 할 일을 다한 것이라고 믿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해 왔다. 이번 방한에서 한국 국가보훈부로부터 ‘평화의 사도’ 메달을 받은 것만으로도 뜻깊다.

다만 굴곡진 역사를 후대가 잊지 말아줬으면 한다. 교육을 통해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고, 참전용사의 노력을 기억해 준다면 감사하겠다.”

데씨 달케 두카모 주한에티오피아대사, 테스파예 아스마마우 참전용사, 신광철 한국전쟁참전국기념사업회 회장(왼쪽부터). /한국전쟁참전국기념사업회 제공

─당시로 돌아가더라도 또 참전용사의 길을 걷겠나.

“다시 선택할 수 있더라도 참전할 것이다. 한 치의 후회도, 망설임도 없다. 설령 지금 또 전쟁이 터지더라도 전장에 나갈 것이다.”

─6·25전쟁 참전용사로서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나.

“1989년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분단됐던 동독과 서독이 하나가 되는 것을 보며 가장 먼저 한국 생각이 났다. 피 흘리며 지켜낸 한반도에도 영구한 평화가 찾아오길 바란다.

오늘날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이어져 있지만, 여전히 전쟁은 끊이지 않는다. 러시아에서도, 중동에서도 총성이 끊이지 않고 있다. 더 이상의 전쟁은 없기를, 모두가 평화 속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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