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플러그 뽑자 전세계 AI가 멈췄다... 18일의 셧다운이 남긴 청구서 [찐밸리 이야기]
앞당겨진 '소버린 AI' 군비 경쟁
미·중 틈새 노리는 중견국 연대
편집자주
내로라하는 기술 대기업이 태동한 '혁신의 상징' 실리콘밸리. 다양성을 핵심 가치로 내세우지만 거주민 중 흑인 비율은 2%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화려한 이름에 가려진 실리콘밸리의 다양한 얼굴을 '찐밸리 이야기'에서 만나 보세요.

“인공지능(AI)은 프랑스에 핵무기보다
더 중요한 전략적 의미를 갖는다.
AI를 정복하거나 당하거나,
제3의 길은 없다.”
브뤼노 르타이요 프랑스 상원의원
프랑스 유력 대선 후보로 꼽히는 브뤼노 르타이요 프랑스 상원의원이 최근 언론 인터뷰와 대선 공약 발표 등에서 한 이 발언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그가 지난달 13일 “우리는 하룻밤 사이에 플러그를 뽑힐 수 있는 나라”라며 AI 종속의 섬뜩한 미래를 경고한 건 미국 상무부가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앤트로픽의 최신 AI 모델 ‘페이블 5(Fable 5)’의 글로벌 접속을 차단하며 이른바 ‘비상정지 버튼(Kill Switch·킬 스위치)’을 누른 다음 날이다. 그는 프랑스 일간 르 피가로 인터뷰에서 “핵이 주권을 지키는 수단이었다면, AI는 주권 그 자체가 될 것”이라고도 강조했다.
미국의 기습적인 통제로 시작돼 18일 만에 막을 내린 이 셧다운 사태는 전 세계 테크 업계와 각국 정부에 뼈 아픈 진실을 각인시켰다. AI는 더 이상 혁신적인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국가가 통제하고 무기화할 수 있는 ‘전략 자산’이라는 사실이다. 미국의 AI 인프라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한국에 이번 사태는 미국 기술에 종속될 경우 치러야 할 청구서의 미리보기인 셈이다.
긴급 행정명령에 멈춰 선 글로벌 AI 생태계

발단은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리오 아모데이 앤트로픽 최고경영자(CEO)는 자사의 프런티어 모델인 ‘미토스(Mythos)’에 대해 사이버보안 위험을 경고하며 대중 공개를 보류했다. “너무 강력해서 아직은 널리 배포하기에는 이르다”는 게 이유다. 이후 1,000시간 이상의 해킹 시뮬레이션(레드팀)을 거쳐 안전장치를 탑재한 일반 소비자용 모델 ‘클로드 페이블 5’를 지난달 9일 대중에 공개했다.
그러나 시장의 환호는 사흘 만에 멈췄다. 같은 달 12일 미 상무부는 “국가안보 권한에 따라, 페이블 5 및 미토스 5에 대한 모든 외국 국적자의 접근을 즉시 중단하라”고 앤트로픽에 통보했다. 실시간으로 클라우드를 통해 쏟아지는 수백만 건의 접속 요청(API 호출)에서 사용자의 국적을 즉각 걸러낼 방법을 찾지 못한 앤트로픽은 공문 수령 후 단 몇 시간 만에 전 세계 모든 고객의 접근을 차단하는 전례 없는 ‘글로벌 셧다운’ 버튼을 눌렀다. 백악관은 “미국의 AI 기술이 적대국의 군사적 목적으로 전용되는 것을 막기 위한 국가 안보 조치”라고 주장했다.
발칵 뒤집힌 각국, ‘AI 주권 강화’ 요구 높아져

미국의 일방적 조치는 동맹국들에 ‘AI 주권 강화’의 필요성을 확실하게 일깨웠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미국의 조치 직후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이번 조치는 순전히 민족주의적”이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파장은 한국은 물론, 유럽, 캐나다, 인도 등으로 번졌다. 단 며칠간의 통제 실험만으로도 각국은 자국 산업이 미국의 클라우드 인프라에 볼모로 잡힐 수 있다는 공포를 체감했다. 미국이 언제든 국가안보를 이유로 반도체 칩 공급망은 물론 AI 소프트웨어 인프라까지 통째로 ‘셧다운’할 수 있다는 선례가 만들어진 것이다.
중국의 추격…봉쇄의 딜레마
같은 달 30일 앤트로픽은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의 허가를 알리며 수출 통제 지침이 해제됐다고 밝혔다. 18일의 통제 기간 동안 미국은 자국의 규제가 오히려 기술 생태계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는 딜레마를 마주해야 했다.
당장 반사이익을 얻은 곳은 중국이었다. 글로벌 개발자들이 발을 구르는 사이, 중국의 즈푸AI 등은 고성능 오픈소스 모델을 발 빠르게 배포하며 빈자리를 파고들었다. 미국 내 반발도 극에 달했다. 앤트로픽은 국방부 계약과 파트너사 연쇄 이탈 등으로 수억 달러 규모의 즉각적 손실을 입었으며, 금융기관과 진행 중이던 1억8,000만 달러 규모 협상이 중단됐다고 주장했다. 100개 이상의 기업 고객이 “극도의 불안과 혼란”을 표했다고도 덧붙였다.
앤트로픽 모델을 활용하는 미국 법률 AI 스타트업 리전이 대표적인 피해 사례다. 지난달 미 연방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던 아서 로스록 최고경영자(CEO)는 9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 소재 자신의 사무실에서 본보와 만나 “사이버보안 전문가들에 따르면 페이블이 국가안보 위험이었다는 근거는 뚜렷하지 않아 보인다”며 “사람들이 이 모델들이 갑자기 차단되지 않을 거라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시장의 불신도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AI 모델을 밥 먹듯 다루는 개발자들은 X와 레딧에서 “(수출 통제 해제 이후에도) 실제로는 페이블 가격을 내고 하위 모델인 오퍼스(Opus)를 쓰는 꼴”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단일 국가 의존은 독" 한국의 생존 과제는

‘18일의 실험’은 전 세계에 AI 주권 강화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환기시켰다. 정보기술(IT) 전문 매체 미디엄은 “클로드 페이블 5가 돌아왔지만 18일간의 금지 조치는 업계가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를 폭로했다”고 지적했다.
막대한 비용을 감수하더라도 한국만의 독자적인 ‘소버린 AI’ 생태계를 구축하고 기술 주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은 더욱 힘을 얻고 있다. 권오현 국가AI전략위원회 AI 민주주의 분과위원은 본보에 “미국의 18일 수출 통제는 AI가 단순한 기술이 아닌 국가 간 압박과 협상의 수단이 됐음을 의미한다”며 “한국 자체 모델 개발 등 역량 확보를 넘어 데이터·컴퓨팅 기반부터 자체 모델, 공공 서비스까지 전체 스택을 어떻게 설계할지 고민하는 것이 진짜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어 “미·중 어느 블록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민주적 중견국들이 AI 기술의 통제와 거버넌스를 함께 다루는 협력 체제를 만들 필요가 있다”며 “2년 뒤 한국에서 열리는 G20을 계기로 한국이 글로벌AI 허브를 주도할 수 있게 준비해야 한다”고도 부연했다.
국가 전략자산이 된 AI 앞에선 동맹도 더는 방패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 그것이 18일간의 셧다운 사태가 남긴 청구서다. AI가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 자산이 된 이상, 그 통제권을 스스로 쥐지 못한 나라가 치를 대가는 이제 막 청구되기 시작했다.
실리콘밸리= 박지연 특파원 jy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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