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이 쓴 복수극과 리오넬 메시 축구화의 공통점
● 제우스, 트로이전쟁에 신 참전 금지 명령
● 히프노스가 제우스 재운 사이 그리스 도운 포세이돈
● ‘히프노스’ 침대, 침구 등 잠 관련 제품명으로 쓰여
● 트로이전쟁 원인 된 ‘헬레네’가 낳은 네메시스
● ‘네메시스’ 이름 붙여진 군함, 롤러코스터의 의미

히프노스의 출생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는 밤의 여신 '닉스'가 남편 없이 혼자 낳았거나, 아니면 닉스와 암흑의 신 '에레보스' 사이에서 죽음의 신 '타나토스'의 형제로 태어났다. 신화 속에서 히프노스의 거처는 두 곳이다. 렘노스섬과 망각의 강 '레테'의 발원지이자 낮과 밤이 만나는 지하 세계의 커다란 동굴이다. 신화 속에서는 동굴 입구를 양귀비나 다른 최면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고 묘사한다. 히프노스의 외형은 어깻죽지나 관자놀이에는 날개가 달린 것으로 묘사한다. 히프노스는 그 날개로 바람을 일으켜 신과 인간의 코에 슬쩍 잠을 불어넣어서일 수도 있다. 실제로 히프노스가 날개로 바람을 일으켜 신을 잠재운 이야기가 신화 속에 있다.
신화의 배경은 트로이전쟁이다. 트로이와 그리스군이 맞서는 상황에서 헤라는 그리스군을 도와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신들의 왕 제우스는 올림포스 신들에게 전투에 개입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트로이 근처 이데산 꼭대기에 앉아 혹시 신들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지도 감시했다. 헤라는 고심 끝에 같은 편이던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제우스의 눈을 잠시 다른 데로 돌려놓을 테니 기별하면 마음껏 그리스군을 도와주라고 당부했다.
헤라는 올림포스 궁전 내실로 들어가 몸을 곱게 치장했다. 그런 다음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찾아갔다. 명목은 그럴듯했다. 물의 신 오케아노스와 그의 아내 테티스 사이의 부부싸움을 말리러 간다는 것이었다. 헤라가 아프로디테에게 빌린 것은 마법의 가슴 띠였다.
트로이전쟁에 신들의 참전 이끈 히프노스
‘케스토스 히마스'라고 불리는 이 가슴 띠는 누구의 마음도 홀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헤라는 아프로디테에게 그것을 받아들자마자 올림포스에서 뛰어내려 피에리아산 등 여러 산봉우리를 징검다리 삼아 금세 렘노스섬에 도착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잠의 신 히프노스를 찾아가 자신이 제우스를 껴안고 눕거든 즉시 그를 깊이 잠들게 해달라고 부탁했다.히프노스는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예전에도 헤라의 부탁으로 그녀가 영웅 헤라클레스를 마음대로 괴롭힐 수 있도록 제우스를 잠들게 했다가 혼쭐이 났기 때문이다. 헤라는 히프노스에게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면 우아함의 여신 카리테스 세 자매 중 하나인 파시테아를 아내로 주겠다고 제안했다. 히프노스가 평소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제야 히프노스는 헤라를 따라나섰다. 헤라는 히프노스를 데리고 급히 이데산에 도착해 혼자서 가장 높은 꼭대기인 가르가론으로 향했다. 히프노스는 제우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미리 이데산에서 가장 큰 전나무 가지 사이에 산새의 모습을 하고 숨었다.
제우스는 아프로디테의 가슴 띠를 두르고 있는 헤라를 보자마자 정욕으로 불타올랐다. 그녀와 보낸 달콤했던 첫날밤을 생각하며 다정하게 어디를 급히 가느냐고 물었다. 헤라는 거짓으로 오케아노스와 테티스의 갈등을 풀어주러 간다고 말했다. 헤라는 이데산에 온 이유에 대해 기별 없이 가면 제우스가 화낼 것 같아서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제우스가 말했다.
"헤라여, 거기라면 나중에도 갈 수 있을 것이오. 자, 그러니 우리 잠자리에 누워 사랑을 즐깁시다. 나는 전에는 한 번도 여신이나 인간 여인에 대해 이런 욕구에 사로 잡혀본 적이 없었소. 테살리아의 왕 '페리이토오스'를 낳아준 '익시온'의 아내 '디아'를 사랑했을 때도, 전사 중의 전사 '페르세우스'를 낳아준 '다나에'를 사랑했을 때도, 크레타의 왕 '미노스'와 '라다만티스'를 낳아준 '에우로페'를 사랑했을 때도,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낳아준 '세멜레'를 사랑했을 때도, '헤라클레스'를 낳아준 '알크메네'를 사랑했을 때도, 심지어는 당신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을 때도 이렇지는 않았소."
헤라는 제우스의 말에 내심으로는 쾌재를 부르면서도 벌건 대낮에 부끄럽게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내숭을 떨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정 잠자리가 소원이라면 올림포스 궁전으로 가자고 유혹했다. 하지만 제우스가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헤라를 안심시키며 품에 안자, 태양조차 엿볼 수 없는 짙은 황금 구름이 그들을 감쌌다.
바로 그 순간 전나무 가지 사이에 숨어 있던 히프노스가 잽싸게 날아와 날갯짓으로 바람을 일으켜 제우스의 콧속에 강력한 잠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제우스가 이내 사랑과 잠에 취해 곯아떨어지자 히프노스는 포세이돈을 찾아가 헤라의 뜻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포세이돈 신이여, 이제는 마음껏 그리스군을 도우시오. 헤라 여신이 제우스를 홀려 사랑의 동침을 하고 있으니, 제우스 신이 잠든 동안 그들에게 승리의 영광을 내려주시오."
영어로 최면이라는 뜻의 'hypnosis'와 수면제라는 뜻의 'hypnotic'도 그리스 신화의 잠의 신 히프노스에서 유래했으며, 불면증을 뜻하는 영어 단어 'insomnia'도 히프노스의 로마식 이름인 솜누스에서 유래했다.
트로이전쟁의 원인 '헬레네'의 어머니 네메시스
히프노스가 트로이전쟁에 신들의 개입을 이끌어낸 신이라면 트로이전쟁의 발단이 된 신도 있다. 바로 그리스 신화의 복수와 불화의 여신 '네메시스'다. 복수의 의미가 녹아 있는 만큼 네메시스는 다양한 분야에서 이름으로 쓰인다.
지난 3월 동료 기장을 살해한 전직 에어부산 부기장이 기자들을 향해 참회의 말을 하기는커녕 "휴브리스와 네메시스"라고 외쳤다. '휴브리스'는 그리스어 'hybris'의 영어식 발음으로 오만이라는 뜻이다. 즉 자신은 오만을 응징했을 뿐이라는 의미다. 그야말로 후안무치한 궤변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여러 분야에서 자주 쓰이는 이름이 된 네메시스의 출신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작가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따르면 그녀는 밤의 여신 닉스가 혼자 낳은 자식들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로마의 작가 가이우스 율리우스 히기누스(이하 히기누스)의 저서 '이야기'에 따르면 네메시스는 지하 세계의 암흑의 신 '에레보스'와 닉스의 딸이다. 지금은 소실되고 없는 고대 그리스 시인 스타시노스의 저서 '키프리아'에는 네메시스가 제우스의 딸이지만 어머니는 알 수 없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키프리아에 적힌 내용이 사실이라면 네메시스의 신화에 특이한 측면이 있다. 신화 속에는 제우스가 네메시스에게 남녀로서의 사랑을 느끼는 장면이 종종 등장하기 때문이다. 제우스는 어느 날 네메시스에게 사랑에 빠져 갑자기 달려들었다. 놀라 도망치던 그녀는 제우스의 추격을 따돌리려고 바다를 건너면서 물고기로 변신했다가 세상의 끝자락에 도착해서는 오리와 거위로 변신했다. 하지만 네메시스는 결국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에게 사로잡혀 겁탈당하고 말았다.
히기누스의 저서 '천문학에 관해'에서는 제우스와 네메시스의 동침에 관한 다른 이야기도 나온다. 제우스는 네메시스에게 아무리 구애해도 전혀 효과가 없자, 아프로디테에게 부탁해 독수리로 변신한 다음 네메시스 눈앞에서 백조로 변신한 자신을 낚아채 가는 시늉을 하게 했다. 그러자 과연 궁지에 몰린 백조를 불쌍하게 여긴 네메시스가 녀석을 자신의 품 안에 숨겨주었고, 얼마 후 네메시스가 깊은 잠에 빠지자 제우스는 네메시스를 덮쳤다.
이후 네메시스가 알을 하나 낳자, 제우스는 그것을 스파르타의 왕비 '레다'에게 맡겼다. 이어 그 알이 부화해 그리스 신화 최고의 미녀 헬레네가 태어났다. 레다는 그녀를 친딸처럼 키웠다. 이 설에 따르면 알을 낳은 것은 레다가 아니라 네메시스이고 또한 헬레네가 나중에 트로이전쟁의 불씨가 된 것도 그녀가 바로 불화의 여신 네메시스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메시의 축구화 이름도 '네메시스'
그리스 신화에는 네메시스 외에도 '에리니에스'라는 복수의 여신들도 있다. 에리니에스는 태초에 티탄인 시간의 신 '크로노스'가 아버지 하늘의 신 '우라노스'를 거세했을 때 잘린 남근에서 떨어진 피가 땅에 스며들어 생긴 복수의 여신 세 자매 '알렉토' '메가이라' '티시포네'를 총칭하는 이름이다. 우라노스의 피는 땅에 떨어지면서 크로노스에게 복수의 칼을 갈았을 게 분명할 테니 복수의 여신들로 환생했다고 상상하면 될 것이다.
노벨상의 아버지 스웨덴 과학자 알프레드 베른하르드 노벨이 쓴 4막짜리 비극 제목도 '네메시스'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16세기 말 로마에서 가족들을 상습적으로 학대하던 아버지를 살해한 귀족 여성 '베아트리체 첸치'다. 이 책은 노벨이 죽기 바로 직전에 인쇄됐지만, 그가 죽자 내용이 너무 불미스럽고 신성모독이라는 이유로 3부만 제외하고 전량 폐기됐다가 2004년에야 비로소 세상의 빛을 봤다. 아디다스 축구화 중에도 한때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 리오넬 메시가 애용해서 유명해진 '네메시스 메시'가 있다.
김원익 홍익대 문과대 교수·㈔세계신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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