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해녀 숨비소리 잦아든다] “자연산 해산물 제값 못받고 70대만 물질…10년 뒤면 청산도 해녀는 다 사라질거여”
오정열 씨, 고향 제주 떠나 청산도 정착
60~70년대 350명 물질…황금기 보내
인공 양식 기술 확산되며 ‘쇠퇴의 길’
남아있는 해녀 7명 모두 70대 후반
장비 비용 부담에도 지자체 지원 없고
의료시설 열악해 제때 치료도 못받아

식당 안으로 들어가 전복해초비빔밥과 회덮밥을 주문하자 우럭 한 마리가 도마 위에 올랐다. 옆 고무 통에서 건져 올린 전복은 손바닥만 했다. 쓱쓱 썰어 접시에 얹는 손놀림에 망설임이 없다.
이곳을 꾸려나가는 오정열(72)씨는 한 시절 청산도 앞바다를 호령했던 살아있는 전설, ‘청산 해녀’다.
제주도 우도에서 나고 자란 오씨가 청산도 출신 남편을 만나 섬에 정착한 것은 1975년 그의 나이 스물한 살 때였다. 청산도의 해가 뜨고 지는 풍경을 수천 번 마주하며 보낸 세월이 올해로 어느덧 51년째다. 우도 바다에서 수경 하나 쓰고 첨벙거리며 놀던 오씨는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해녀인 어머니의 뒤를 따랐다. 갯가로 향하는 어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바다를 다녔고 조막만 한 손으로 자맥질을 해가며 물질을 배웠다.
배도 짓고 집도 짓던 솜씨 좋은 목수 아버지와 바다를 누비던 해녀 어머니를 둔 덕에 오씨의 집안은 끼니 걱정 없는 유복한 편에 속했다. 오빠가 부산해양고와 제주대를 연이어 졸업했을 정도였다.
오로지 바닷속을 헤집는 물질 하나로 4남매를 번듯하게 키워낸 그녀지만 억척스러운 어머니로 변모한 것은 뭍을 건너 청산도에 발을 내딛고부터다. 고향 앞바다를 부지런히 오가던 시절, 해녀 사업체를 꾸리던 시숙의 배에 올라 작업을 하던 중 남편과 인연이 닿아 부부의 연을 맺었다. 남부러울 것 없던 친정에서의 삶과 달리 타향에서의 신혼은 지독한 가난과 쉴 틈 없는 노동의 굴레였다. 오씨는 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시절 서러움을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쏟아냈다.

연달아 태어난 두 아들을 키웠던 순간은 아직도 뇌리에 박혀 있다. 아들을 위해 당시 한 통에 750~800원 하던 분유를 매일 같이 비워냈다. 물질하러 바다로 나가려면 아이들을 이웃에게 맡겨야 했는데 두 명에 하루 2만원씩 지출해야 했기에 바다에 들어가면 최소 5만원어치는 건져 올려야 수지타산이 맞는다는 절박함뿐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런 고단함 속에서도 오 씨의 가슴속에는 청산도 해녀들이 완도 앞바다를 짙푸르게 물들였던 황금기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반세기 전 청산도는 그야말로 잠수부들의 지상낙원이었다. 1876년 항구 개방 이후 일본인들이 제주 바다의 해산물을 싹쓸이하자, 생존의 기로에 선 제주 해녀들은 출가 물질을 떠나야 했고 그들이 1879년 처음 닻을 내린 곳이 바로 청산도였다.
그 물길을 이어받아 1960~1970년대 청산도는 해녀 350여 명 해녀 배만 14척이 바다를 메울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오씨가 처음 섬에 들어왔을 때도 사방이 물질하는 해녀들로 북적였다.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잠수복을 챙겨 입은 해녀들이 포구로 쏟아져 나와 저마다 배정받은 배에 몸을 실었다. 요즘은 고작 4~5명이 타는 작은 배지만 당시에는 한 배에 18명 많게는 25명씩 다닥다닥 붙어 앉아야 겨우 바다로 나설 수 있었다.
이들의 무대는 완도를 넘어 이웃 진도 앞바다까지 뻗어갔고, 한 번 출항하면 3일씩 거친 파도 위에서 먹고 자며 고된 일과를 견뎠다. 비바람을 막아줄 선실조차 없어 파란 방수 천막 하나에 몸을 숨기고 밤이슬을 피해야만 했다.

5월 단오는 ‘해녀들의 명절’이었다. 청산도는 단오가 되면 섬 전체가 들썩이는 거대한 축제장으로 변했다. 마당마다 돼지를 잡는 잔치 불이 올랐고 포구에 늘어선 배들은 저마다 알록달록한 오색 기를 매달고 만선을 기원하며 춤을 췄다. 이날만큼은 물질 가방을 내려놓은 해녀들이 한데 모여 해남 대흥사로 소풍을 떠나기도 했다. 온 동네가 먹고 마시고 춤추는 소리로 북적였던 그야말로 찬란했던 ‘해녀 전성시대’의 풍경이다.
오씨는 지난해 뜻하지 않은 뇌종양 수술을 받으면서 평생 업으로 삼았던 물질을 멈췄다.
해녀복과 오리발을 차마 버리지 못해 방 한편에 남겨두었다가 올해 봄에야 비로소 다른 청산 해녀에게 물려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해 6월에는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저녁밥 먹고 약 먹는다며 물 떠서 방에 들어갔던 남편이었다. 평생을 함께 바다에서 동고동락했던 남편마저 곁에 없자 더는 바다에 머물 자신이 없어졌다.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했던 50년 된 소쿠리는 불과 수일 전에 겨우 처분했다. 보기만 해도 가슴속 한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살림이라 손때 묻은 것을 차마 놓지 못했는데 “이제 그만 소쿠리도 버리는 게 어떻겠냐”는 작은딸의 권유에 비로소 마음을 비워냈다.
전문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197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급격한 이촌향도 현상과 가두리 등 인공 양식업의 팽창, 자연산 해조류의 가격 폭락이 겹치면서 청산도 마을 어장도 가파른 내리막길을 걸었다.
1970년 1만 3121명으로 북적이던 인구는 2000년 3293명으로 쪼그라들었고, 현재는 2053명까지 급감해 섬의 동력을 상실한 상태다. 유명 영화 촬영지로 알려지며 유채꽃이 만발하는 봄철마다 관광객이 몰려들지만, 정작 원주민들에게는 뚜렷한 생계 수단이 없어 정든 고향을 등지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이 때문에 1970년대 후반부터는 청산도의 해녀 사업도 눈에 띄게 축소됐다. 인공 양식 기술이 가파르게 확산되면서 해녀들이 목숨을 걸고 채취해 온 자연산 해산물의 경제적 가치도 곤두박질쳤다.
오씨는 “이제는 바다가 온통 전복 양식장이라 해녀들이 힘들게 따온 자연산 전복마저 단가를 헐값으로 낮춰버린다”며 “돈이 안 되니 이제는 해녀들이 깊은 바다로 들어가 전복을 따려고 하지 않는다”고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현재 섬에 남은 동료는 고작 7명 남짓으로, 이마저도 70대 중후반의 노령이라 80세를 코앞에 두고 있어 명맥 단절은 시간문제다.
“이제 정말 10년만 지나면 청산도에서 해녀는 아예 사라지고 없을 거여.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존재들처럼 말이제. 지금은 그 많던 사람들 중에 10명도 안 남아 겨우 물질을 이어가고 있지. 3년 전만 해도 74살 먹은 동료 해녀가 바다에서 심장마비로 목숨을 잃었어. 사고로 죽고 잠수병으로 아파서 죽고 여기 섬에는 병원이 없다 보니 제때 치료를 못 받아 결국 청산을 떠나버리기도 하고. 앞으로 우리 바다는 누가 지키고 험한 서남해안 물길은 이제 누가 알려주나 싶어 눈앞이 캄캄하지.”
거친 파도를 헤치며 살아온 그녀의 마지막 바람은 지자체와 정부 차원의 현실적인 의료비 지원과 필수 장비 보조다. 처음 정착할 당시 1만 3000원 선이던 고무복 가격은 60만원까지 치솟았지만, 지난 2017년 완도군 차원의 단발성 지원을 제외하면 국가적 관심은 철저히 외면당해 왔기 때문이다.
/완도 글·사진=김다인 기자 kd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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