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일상은 어떠한가 … 고흐·바스키아가 내게 묻네
'거장들도 평범하게 살았겠지'
미대 수업서 떠올린 아이디어
화가부터 명화 속 주인공까지
일상 속 한 화면에 담아 표현
日·中·대만 컬렉터들 주목
작품 구매 대기만 1년 넘어
"특별·평범함 서로 멀지않아
관객들이 하루 돌아봤으면"

미술대학의 한 누드 수업 풍경. 산드로 보티첼리의 명화 속 비너스가 교실 한가운데서 모델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비너스를 둘러싼 이젤 앞에는 빈센트 반 고흐, 장미셸 바스키아, 프리다 칼로 등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예술가들이 앉아 그림을 그린다.
서울 성동구 아뜰리에 아키에서 개인전 '일상의 계절학: 여름 가을 겨울 봄'을 열고 있는 권능 작가의 신작 속 장면이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해 "반 고흐나 바스키아 같은 예술가들도 결국 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을 살았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중국, 일본, 대만 등 아시아 지역 컬렉터들이 먼저 주목한 그는 최근 국내 미술시장에서도 존재감을 키우고 있는 1990년생 작가다. 작가는 역사 속 예술가들을 오늘의 일상으로 불러내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위대한 예술가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작업이 잘 안 돼 고민하고, 친구들과 커피를 마시며 평범한 하루를 살았을 것이다."

◆ 일상의 공간에 등장한 예술가들
그의 그림에는 예술가의 작업실과 미술대학의 실기실, 아트페어 현장, 한강공원 등 일상의 공간이 자주 등장한다. 그 공간 속에는 미술사 속 예술가나 명화의 주인공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살아간다. 아트페어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와 얀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렘브란트의 자화상, 나라 요시토모의 캐릭터가 관람객처럼 전시장을 거닌다.
이 같은 작업은 작가가 대학생이던 2013년 홍콩 아트페어를 방문하면서 출발했다. 작가는 "당시 무라카미 다카시를 직접 본 것이 무척 신기했다"며 "멀게만 느껴졌던 예술가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현실의 사람으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이후 대학 실기 수업에서 누드 모델을 그리던 중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그는 "옆자리에서 그림을 그리던 친구들의 고민이 미술사 속 예술가들의 고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 점에 위로받았고, 교과서 속 예술가들이 강의실에서 함께 그리는 장면을 그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고흐나 바스키아도 작업이 잘 안 돼 고민하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커피를 마시고, 여행하고 산책하며 각자의 삶을 살았을 것"이라며 "우리의 일상에 그들이 있는 장면을 그리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들은 역사 속 예술가와 명화 속 인물들이 하나의 일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담는다. 작가가 직접 방문한 곳을 그리는 점도 특징이다. 장소를 인위적으로 찾기보다 일상이나 산책 중 우연히 마주친 장면을 포착한다. 지인들과 화실에서 다 함께 굴을 쪄 먹던 기억이나, 맥주 캔이 굴러다니는 일상의 풍경을 화면에 그대로 옮기는 식이다.
작가는 고흐와 바스키아, 렘브란트, 보티첼리의 비너스,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작품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5명으로 꼽았다. 그는 "고흐와 바스키아는 영화나 책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리게 됐다"며 "반면 미술사적 기록이 거의 남지 않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화면 위에서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많이 준다"고 했다. 이어 "삶에 굴곡이 많았던 렘브란트의 자화상에서는 창작자로서 개인적인 자극을 많이 받는다"고 설명했다.
◆ 한국 미술과 문화재도 재해석
초기 작업이 주로 예술가와 실기실 배경에 집중됐다면, 대학 졸업 이후에는 영화배우나 대중문화 캐릭터 등으로 도상의 범위가 점차 넓어졌다. 작가가 일상에서 직접 보고 겪은 경험과 영화, 만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얻은 인상이 작업에 반영된 결과다. 실제로 그의 화면에는 비틀스와 디즈니 애니메이션 캐릭터, 라부부 인형 등이 일상적 공간에 자연스럽게 배치된다. 작가는 익숙한 공간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장치로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활용하고 있다. 이번 신작에는 여의도 한강 공원을 배경으로 한 작품도 있다. 한국의 문화재와 예술 작품 속 인물들이 특히 많이 등장한다. 반가사유상은 물가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고, 신윤복의 '단오풍정' 속 여인들은 머리를 감고 있다. 이중섭의 '물고기와 노는 세 아이' 속 아이들이 등장하고, 민화 '호작도' 속 호랑이는 길고양이처럼 서 있다. 권능의 작업은 샤를 보들레르가 '현대적 삶의 화가'에서 말한 '산보자'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화면 속 예술가들은 군중 속을 거닐며 도시를 관찰하는 산보자다.
작가는 "우리 일상에는 이미 수많은 예술과 역사, 그리고 이야기들이 녹아 있다"며 "새로운 역사와 새로운 이야기 역시 거창하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 위에서 만들어진다"고 전했다. 이어 "서로 다른 시대의 예술가와 역사 속 인물, 현대의 캐릭터들이 하나의 일상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관람객들이 자신의 일상을 조금 다르게 바라봤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 정교한 재현력…해외서 줄줄이 팔려
작가의 강점 중 하나는 뛰어난 재현력이다. 고흐의 거친 붓질과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길고 단순화된 인물 표현, 동양화의 먹 선과 번짐까지 자유롭게 구사한다. 홍콩 영화 속 량차오웨이(양조위)와 진청우(금성무)의 모습도 사진처럼 정교하게 옮겨낸다. 이미지를 순식간에 만들어내는 인공지능(AI) 시대에 회화만의 강점은 무엇일까. 작가는 "회화는 단순히 하나의 결과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오랜 시간 고민하고 선택하며 남긴 시간의 흔적을 담고 있다"며 "이미지는 순식간에 만들어질 수 있지만, 회화는 시간을 압축해서 담아내는 매체"라고 답했다. 작가는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한 뒤 중국 선전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과 중국 선양미술관, 박서보재단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지난해 박서보재단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작가의 작품은 ART021 상하이, 아트 타이베이, 아트 마이애미 등 해외 페어에서 컬렉터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 3월 열린 아트센트럴 홍콩에서는 출품작이 모두 판매됐다. 아뜰리에 아키 관계자는 "해외 아트페어를 통해 작품을 찾는 컬렉터가 꾸준히 늘면서 개인전 일정이 2년가량 미뤄졌다"며 "작품을 구입하기 위해 1년 넘게 기다리는 해외 컬렉터가 많고, 개인 컬렉터뿐 아니라 미술 기관과 시장 관계자들도 주목하는 작가"라고 말했다.
작가는 "전시가 '지금 나는 어떤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며 "특별한 것과 평범한 것은 사실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전시는 8월 8일까지.
[정유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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