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R 자금 韓 투자 말고 美공장 지으란 말인가 [트럼프 스톡커]
마이크론, 대미 투자액 500억 달러 추가 증액
하닉 상장 하루 전 ‘반도체 부활’ 압박 메시지
러트닉 “삼성·SK도 질투심 느껴 공장 지을 것”
트럼프 “세계 칩 50%를 美로”...관세도 거론
‘외국기업 최대 IPO’ 265억 달러 투자처 주목

SK하이닉스(000660)가 10일(현지 시간) 미국 나스닥시장에 주식예탁증서(ADR)를 상장하면서 40조 원 상당의 자금을 조달하기로 한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곧바로 대미 투자 압박 메시지를 던져 눈길을 끌고 있다. 당초 SK하이닉스는 이번에 조달할 달러 자금 대부분을 한국 내에 투자할 계획이었으나,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이 자칫 외국 기업에 기존 방침을 바꾸라는 요구로 해석될 수 있어서다. 여기에 SK하이닉스, 삼성전자(005930)와 함께 메모리반도체 시장을 삼분하는 마이크론까지 대미 투자액을 75조 원이나 더 늘리면서 트럼프 행정부에 적극 동조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을 완전히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야심이 SK하이닉스 ADR 상장 전후에 또다시 부각됐다는 분석이다.

9일(현지 시간) 마이크론은 미국 뉴욕주 클레이타운에 건설하는 팹(반도체 생산공장)의 콘크리트 타설 기념식에 맞춰 2035년까지 미국 내 반도체 생산공장과 기술 투자 규모를 2500억 달러 이상으로 확대한다고 밝혔다. 인공지능(AI) 시대 메모리 수요 급증에 맞추겠다는 게 명목상의 이유이지만, 그 장소를 굳이 미국으로만 설정하면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에 발을 맞추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했다. 앞서 마이크론은 올 5월 22일 미국 버지니아주 머내서스 메모리반도체 공장 증설 기념식에서 미국 내 투자 규모를 기존 1700억 달러에서 2000억 달러로 늘리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산제이 메흐로트라 최고경영자(CEO)는 “미국이 건국 250주년을 맞이하는 가운데 데이터와 메모리반도체가 현대 경제의 초석이 됐다”며 “이런 시대에 발맞추기 위해 미국 내 투자 규모를 2035년까지 2500억 달러 이상으로 확대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투자는 뉴욕주 클레이타운 반도체 공장 투자 비용과 아이다호·버지니아주 등의 팹 확장 비용을 모두 합한 액수다. 마이크론은 나아가 뉴욕 팹의 첫 콘크리트 타설 작업도 계획보다 한 분기 이상 앞당겨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마이크론은 이 같은 투자가 자사 D램의 40%를 미국 내에서 생산하겠다는 목표를 뒷받침하는 동시에 9만 개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고 기대했다.
마이크론은 또 미국 내 반도체 공급망 생태계 강화를 위해 최대 30억 달러(약 4조 5000억 원)를 추가 투자하겠다고 공표했다. 이 가운데 5억 달러는 10년 공급계약을 통해 대만 기업 글로벌웨이퍼스의 미국 텍사스주 웨이퍼 제조시설 확장에 투여하기로 했다.
시장조사 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마이크론은 올 1분기 기준 D램 시장 점유율 22%, 고대역폭메모리(HBM) 점유율 21%로 모두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 이은 글로벌 3위다. 마이크론의 투자 증액 소식에 힘입어 이날 뉴욕 증시에서는 마이크론(4.54%), AMD(5.67%), ASML(2.01%), 인텔(2.09%),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3.18%), 브로드컴(3.20%), 램리서치(6.01%), ARM(9.20%), 샌디스크(7.59%), 마벨테크놀로지(4.99%) 등 그간 부진했던 반도체 관련주들이 일제히 반등했다. 필라델피아반도체지수도 3.06% 상승했고 다우존스30산업평균지수(0.27%),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0.81%), 나스닥종합지수(1.30%)도 모두 강세를 보였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러트닉 장관은 이날 메흐로트라 CEO가 주재한 해당 행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여러분이 사업을 영위해야 할 곳은 바로 미국임을 분명히 밝혔으며 세계가 이에 빠르게 반응하고 있다”며 “미국 투자에 지금보다 더 좋은 시기는 없었다”고 역설했다. 러트닉 장관은 또 “나는 경쟁사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미국으로 불러와 생산 시설을 짓게 하고 싶다”며 “마이크론이 앞장서고 있으니 경쟁자들은 질투심을 느낄 것이고 결국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러트닉 장관은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으면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관련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러트닉 장관은 ‘애플이 반도체 가격 급등에 대응해 중국의 창신메모리(CXMT), 양쯔메모리(YMTC)를 공급 업체에 추가하려는 조치를 승인할 생각이느냐’는 질문에는 즉답을 피했다.
마이크론은 지난해 12월부터 뉴욕주에 1000억 달러(약 150조 원)를 들여 미국 역대 최대 규모의 반도체 제조 시설을 건설하고 있다. 뉴욕주 반도체 시설은 부지 면적만 서울 여의도(약 2.9㎢)의 두 배 수준인 약 5.67㎢에 달하는 대규모다. 총 4개의 공장 가운데 첫 공장은 2030년, 두 번째 공장은 2033년, 세 번째 공장은 2038년, 네 번째 공장은 2045년에 각각 가동한다. 마이크론은 2022년 10월 해당 사업 계획을 발표할 당시 이 시설을 두고 “앞으로 10년간 미국산 최첨단 D램 생산량을 전 세계 생산량의 40%까지 늘리려는 전략의 일환”이라고 소개했다.
러트닉 장관은 올 1월 16일 해당 공장 착공식에도 참석해 트럼프 행정부의 높은 관심을 반영했다. 러트닉 장관은 착공식 직후 CNBC 인터뷰에서 1월 15일 대만과 맺은 무역 협정 내용을 거론하며 “대만의 투자 규모는 직접 투자와 중소기업에 대한 정부 보증까지 합쳐 총 5000억 달러”라고 소개했다. 이어 “TSMC가 애리조나주 인근 땅을 방금 매입했고 미국 생산 규모는 두 배가 될 것”이라며 “수백 개 기업과 함께 대만 전체 반도체 공급망과 생산량의 40%를 미국으로 가져오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러트닉 장관은 또 “만약 그들이 미국에 공장을 건설하지 않으면 관세는 100%가 될 가능성이 크고 이는 당근이 아닌 채찍”이라고 덧붙였다.
마이크론은 5월 22일 버지니아주 메모리반도체 공장 증설 행사에서도 미국 내 총 투자 규모를 기존 1700억 달러에서 2000억 달러로 늘리고, 이 가운데 아이다호주 시설 투자액을 250억 달러에서 500억 달러 증액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연구개발(R&D)과 HBM 패키징(후공정) 투자 금액도 450억 달러에서 500억 달러로 늘렸다. 당시 행사에는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참석했는데, 그는 이 자리에서 “반도체에 대한 전면적인 품목 관세가 당장은 없겠지만, 적절한 시점에 부과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리어 대표는 “반도체에 관세를 부과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며 “이 같은 시설들을 보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반도체 관세를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수준으로 시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이크론이 자국 투자 규모를 늘릴 때마다 TSMC와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도 위협 발언을 계속 꺼낸 것이다.

마이크론의 대미 투자 증액과 러트닉 장관의 한국 기업 생산시설 유치 발언은 SK하이닉스의 ADR 상장과 맞물려 해석됐다. 실제 같은 날 SK하이닉스 주당 149달러에 ADR 공모가를 확정하고 기업공개(IPO) 자금 조달 규모는 265억 달러(약 40조 원)로 책정했다. 149달러는 9일 코스피시장 SK하이닉스 보통주 종가인 218만 6000원(약 1445달러)을 ADR 기준으로 환산한 가격보다 2.9% 정도 높은 수준이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공시에 따르면 ADR 1주는 SK하이닉스 보통주 10분의 1에 해당한다. SK하이닉스 ADR은 10일 나스닥 글로벌셀렉트마켓에서 종목명 ‘SKHYV’로 임시 거래를 시작해 13일부터 ‘SKHY’로 바뀌며 정규 거래로 전환된다.
SK하이닉스 IPO 조달 규모는 2014년 중국 알리바바의 250억 달러를 넘는, 외국 기업의 미국 증시 상장 사상 최대치다. 미국 기업까지 포함해도 지난달 12일 나스닥시장에 상장한 스페이스X의 857억 달러(약 130조 원)에 이은 두 번째 기록이다. 글로벌 시장 전체로 넓혀도 2019년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가 자국 IPO에서 조달한 294억 달러에 이은 세 번째 규모다. 최근 한국 증시 보통주 가격이 하락하면서 당초 월가에서 예상했던 290억 달러(약 45조 원)보다는 전체 금액이 다소 적어졌다. SK하이닉스 측은 “이번 IPO에서 유일하게 프리미엄 프라이싱(공모가 할증)도 달성했다”고 강조했다.
SK하이닉스의 IPO 성공은 이미 수요예측 단계에서 어느 정도 예견됐다. 8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이날 마감된 SK하이닉스 ADR 수요예측에는 공모 물량의 7배가 넘는 청약이 몰렸다. 청약 대금 기준으로 1715억 달러(약 260조 원)에 이르는 주문이 쏟아졌다는 뜻이었다. 이 가운데 베일리 기포드, 코튜 매니지먼트, 시추에이셔널 어웨어니스 등은 최대 70억 달러 규모의 투자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 소식은 9일 뉴욕 증시에서 마이크론의 대미 투자 증액 결정과 함께 반도체 관련주의 주가를 대거 견인하는 호재로도 작용했다.
SK하이닉스 상장과 관련해서는 스위스계 투자은행(IB)인 UBS가 7일 “ADR은 매수하고 한국 주식은 매도하라”고 투자자들에게 권고해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한국 주식과 상호 교환하는 데 제약이 있다는 점 때문에 ADR 가격에 웃돈이 붙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였다. UBS는 투자자 노트에서 “첫날부터 ADR을 매수하고 한국 주식을 공매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SK하이닉스는 미국의 압박에도 ADR 조달 자금을 경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1기 공장 등에 대한 시설투자 자금으로 활용할 계획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시장은 상장 이후에도 트럼프 행정부가 추가적인 투자 압력을 가할지에 관심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근로 문화, 인건비, 원자재 가격 등 메모리반도체 생산에 불리한 여건이 많은 미국에 생산시설을 늘리는 일은 천하의 SK하이닉스에도 막대한 부담인 까닭이다.

뉴욕=윤경환 특파원 ykh22@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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