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어때]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도리없는 그것, 영화 ‘회로’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217번째 레터는 8일 개봉한 영화 ‘회로’입니다. 이 영화, 무섭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팬클럽 회장하고 싶다”고 했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작품인데, 공포가 뭔지 너무 잘 아시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아리 에스터의 ‘유전’이 어안이 벙벙하고 파괴적으로 끔찍한 공포라면, ‘회로’는 조용하고 느린데 섬찟한 공포라고나 할까요. 피 한 방울 안 튀기고, 깜놀 장면 한 번 안 나오는데, 무섭습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는 공포영화 역사에 새겨진 아주 유명한 귀신이 나옵니다. 공포영화 팬이라면 한번 봐두시는 게 도움이 되실 거예요. 무서운 게 그리울 때마다 떠오르실 거거든요.

제가 위에서 봉준호 감독이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팬클럽 회장을 하고 싶다”고 했던 말을 먼저 말씀드렸는데, ‘살인의 추억’ 범인 모티브를 구로사와 감독의 걸작 ‘큐어’(1997)를 보고 참고했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큐어’보단 덜 알려졌지만 ‘회로’도 무섭습니다. 지울 수 없는 얼룩처럼 번지거나 스며드는 무기력한 공포가 내내 달라붙습니다. 2001년 작품인데 이번에 4K 버전으로 상영해요. 구로사와 감독은 올해 71세인데, 여전히 현역입니다. 올해 칸 영화제 프리미어 부문에 신작 ‘흑뢰성’으로 초청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답은 여러가지 가능하겠죠. 저는 ‘회로’가 제시하는 답을 보고, 역시 거장은 다르구나, 했습니다. 흔히 보여주는 귀신 갖고도 이렇게 다르게, 인간이 무엇인지를 한 번 더 돌아보게 보여줄 수 있구나, 싶어서요. 공포는 인간의 근원적인 심리이다보니 20년도 더 된 영화인데도 무서운 건 무섭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얘기냐. 영화가 시작되면 바다에 뜬 배가 나오고, 갑판에 한 여자가 서있습니다. 하늘은 음울하고 음산하기 짝이 없고. 여자에게 누군가 다가오는데, 선장입니다. ‘큐어’의 야쿠쇼 코지가 특별출연했습니다. 이어 여자의 목소리가 흐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게 그 일이 시작되었다.” 이 말과 함께 그녀가 왜 배에 타게 됐는지를 설명해줄 과거 시점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일’이라는 게 뭔지 밝혀지는데.

전말을 알기 위해선 두 인물을 따라가야 합니다. 먼저, 갑판의 그녀. 이름은 미치. 화원(花園)에서 일하는데, 동료가 일주일째 연락 두절이라 집에 찾아갑니다. 그런데 동료가 집에 있었어요. “뭐야, 있었네.” “미치, 웬일이야?” “연락 안 돼서 걱정했잖아.” “그랬구나, 미안.” 평상시처럼 인사를 나눈 두 사람. 그런데 잠시 후, 등 너머 동료가 답이 없어 돌아보니. 맙소사. 그가 목을 매 숨져있습니다. 아니, 왜 갑자기?
또 한 사람은 대학생 료스케. 인터넷이라는 것을 써보려고(25년 전 영화니까요) 연결을 했는데 화면 안에 낯선 남자가 엎드려 있다가 그를 쳐다봅니다. 이어 화면에 뜨는 글씨. “유령을 만나고 싶나요?” 놀라서 컴퓨터를 끄는데. 그가 잠든 사이 컴퓨터가 저절로 켜지고 화면 안 음산하게 어두운 방에 누군가 검은 봉투 같은 걸 머리에 쓰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컴퓨터는 저절로 켜지는 것이며, 화면 속 사람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일이 이어지는 중에 주변 사람들이 온다간다 말도 없이 하나둘 사라지고, 벽에는 사람 모양의 검은 얼룩이 늘어갑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여기에서, 이 영화에 나오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말씀드릴게요. 영화 중간에 드러나는데, 그것은 바로.
고독입니다.
죽음보다 무서운 고독이 세상을 감염시키면서 사람들이 존재하기를 포기하고 하나둘 자살하거나 소멸을 선택한 거죠. 고독을 감염시켜 절망을 퍼뜨리는 것은 유령, 즉 귀신입니다. 귀신이 왜 출몰하느냐는 등장인물이 자신의 가설이라며 들려주는 설명이 있습니다. “사후세계에 혼, 의식, 영혼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무한하지 않았던 거지. 꽉 차서 더는 들어갈 수 없게 되고 어딘가로 넘쳐흐르게 되지. 영혼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넘어올 수밖에 없어. 회로가 열린거야.” 여기에서 제목의 ‘회로’가 나옵니다. 넘쳐흐르게 된 귀신들이 현실 세계로 넘어오는 통로로 인터넷망을 회로처럼 이용해서 건너왔다는 거죠.
넘어온 귀신들은 사람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모르는 새 조용히 나타나기만 합니다. 나타나는 귀신 중에 공포영화 역사상 무섭기로 손꼽히는 귀신이 있는데, 정상 인간의 관절로는 흉내내기 어려운 기괴한 비틀거림, 어기적어기적 휘청휘청 각자 따로 노는 섬뜩한 팔다리 움직임이 오싹하고 소름끼칩니다. 이건 직접 보셔야 합니다. 문에 붙은 빨간 테이프 뜯어내면 만나게 되니, 보시다가 그 장면이다 싶으면 눈을 크게 뜨고 보세요. 으.

이 영화가 나올 무렵 인터넷은 새 시대의 희망을 펌프질하는 자양강장제였습니다. 그런 세상에 대고, 연결은 어리석은 희망이며 인간을 철저히 고립시키고 더욱 외롭게 할 거야~~ 외친 구로사와 감독님, 몇 수 앞을 보신건가요. 료스케의 대학 동료는 말합니다. “죽으면 어디로 가나 어릴 때부터 생각했어. 항상 혼자였거든. 죽고나면 저쪽 세계에서 다같이 즐겁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했어.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 죽어서도 혼자면 어쩌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너무 무서워. 견딜 수가 없어. 죽어도 달라지지 않고 이 상태가 계속되는거야.” 그 공포가 현실이 됩니다. 인간이 만든 인터넷에 의해서요.
구로사와 감독은 워낙에 설명을 싫어하는 걸로 유명합니다. “‘유전’을 봤는데 결말에서 너무 설명을 다해줘서 실망했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유전’의 결말이 설명이 많다고 느끼셨다니, 감독끼리는 그렇게 통하는 건가요.) 모순은 모순대로, 난해하면 난해한대로 두면 관객이 알아서 재밌어한다는 주의인거죠. “사실 인간이란 연결돼 있지 않아. 각자 따로따로 살고 있는거야. 난 그렇게 느껴.” 료스케에게 인터넷 사용법을 알려주던 동료의 말인데, 주인공 미치와 료스케가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른 선택을 하면서 마무리되는 ‘회로’의 결말은 보는 분에 따라 해석이 다를 것 같습니다. 공포영화 좋아하시면 이번 기회에 꼭 보세요. 오늘도 인터넷으로 연결돼 ‘그 영화 어때’를 읽고 계신 독자 여러분들은 저와 연결된 걸까요, 저를 더 외롭게 하는 걸까요. 저는 전자라고 믿습니다. 그럼, 어쩌면 무망할지도 모르는 연결을 바래보며, 저는 다음 레터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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