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런 보험설계사들도 있습니다 [사람IN]

평화활동가로 7년을 보냈다. 퀴어이고 활동가였던 김주원씨(35·사진 가운데)에게 삶은 제대로 된 ‘안정’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다. 불안은 자주 삶을 갉아먹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혼자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다. 특히 활동가들에게는 경제적 문제가 분명한 어려움으로 존재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나이 들어갈까. 먹고살 수 있을까···.’ 과로로 쓰러지는 선배 활동가들을 지켜보며 김씨는 미래를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두려움이 다른 일을 찾아보도록 김씨의 등을 떠밀었다. 보험설계사 자격증을 딴 건 3년 전이다. 보험은 법과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는 영역에서 서로의 곁을 지킬 권리를 상상할 수 있게 했다. 내친김에 지난 3월 ‘차별 없는 금융연구소(이하 연구소)’를 만들었다. 새로 만든 명함에는 ‘다채로운 정체성이 오롯이 존중받는 사회를 설계합니다’라는 문구를 새겼다. “저는 이제 활동가는 아니지만, 활동가나 퀴어를 살리는 사람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의 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활동을 찾은 거죠.”
김주원씨의 고등학교 동창인 신수림씨(35·왼쪽)는 연구소에 첫 번째로 의기투합한 동료다. 연구소를 만들기까지 가장 많이 논의한 사람이기도 하다. 신씨 역시 퀴어 당사자다. 사회복지학 석사를 마친 뒤 관련 직업을 구하려고 했을 때 ‘오버 스펙’이 문제가 됐다. 사회복지업계에 진입하지 못한 대신 ‘N잡러’가 됐다. 보험설계사도 부업 중 하나였다. “보험설계사 자격증은 있지만 적극적으로 한 건 아니고 누가 물어보면 간간이 판매하는 수준이었어요. 저한테도 이 업종에 대한 ‘색안경’이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평생 활동가로 살아온 주원이가 보험 영업을 하겠다고 하니, 같이 하면 다른 방식으로 이 일을 해볼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연구소에 함께해달라는 제안을 듣고 집에 가면서 처음으로 ‘보험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했어요.” 신씨에게 사회복지는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학문이었다. 보험도 그럴 수 있을까? 그러기를 바란다. 신씨는 자잘한 N잡을 정리하고 8월부터 본격적으로 연구소에 합류했다.
누군가는 골프를 배워야 보험 영업에 도움이 된다 하고, 누군가는 의사 같은 고소득 전문직 분야를 개척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개인사업자이자 서로가 경쟁자이기도 한 보험업에서 연구소처럼 팀을 이뤄 일하는 건 매우 드문 사례다. 연구소에 세 번째로 합류한 멤버 백승덕씨(44·오른쪽)는 병역거부자로 징병제 관련 독립 연구자로 생계를 꾸려왔다. 결혼하고 아이가 자라면서 더는 같은 방식으로 삶을 잇기가 어려웠다. 어머니의 직업이기도 한 보험설계사는 백씨에게 문턱이 낮은 직업이었다. “보험 영업을 하는 이유는 돈이 전부라고 생각했죠. 사보험이라는 게 아무래도 불안을 파는 상품이고, 공공성을 해칠 위험이 다분한 영역이라는 것도 계속 주의를 기울여야 했고요. 같은 고민을 하는 동료가 없는 일이라는 게 무엇보다 외로웠어요.” 고립감을 느끼던 때 연구소를 알게 됐다. 연구소 활동을 지켜보며 사보험 안에서도 공공에 기여할 부분이 있을 수 있겠다는 힌트와 자신감을 얻었다. “보험을 단순한 상품을 넘어 재정과 재무의 관점에서, 그래서 삶을 계획하는 문제로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제 시야도 넓어졌어요.”
신씨와 백씨가 연구소에 합류한 가장 큰 이유는 김씨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무엇보다 김씨가 고객을 바라보는 태도를 좋아한다. 보험을 계약자의 삶을 함께 고민해주는 ‘긴 약속’으로 여기는 신중한 태도다. 김씨는 그 맥락 안에서 연구소 이름을 지으려고 오래 궁리했다. “그냥 차별 없는 ‘보험’ 연구소로 할까? 아니면 상담소로? 같은 생각도 했어요. 보험설계사 하면 우리는 영업직이라는 부분을 많이 떠올리고, 그렇게 경험하잖아요. 그런데 직접 일을 해보니 계약자의 삶의 이야기를 총체적으로 듣고 미래를 함께 고민하는 일이기도 하더라고요. 고정 지출, 현재 소득, 일자리, 가족관계 구성 등 굉장히 내밀한 정보를 촘촘히 살펴야 좋은 설계를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금융이라는 이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연구소가 목소리를 내야 하는 부분도 더욱 분명해졌다. 기존의 법과 제도가 안전망이 되지 못하는 사례를 발굴하고 공백에 대해 말하기. 아직 법적 지위를 얻지 못한 퀴어 가족의 보험수익자 지정 문제가 대표적이다. 이성애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난임 보장도 마찬가지다. 관계가 아닌 개인에 중심을 둔 안전망을 만들기 위한 이야기를 조사하고, 모으고, 말하려고 한다. 김씨는 비효율의 효율을 말했다. “주류 보험영업 시장에서 보면 저희 활동이 굉장히 비효율적이겠죠. 하지만 그동안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누군가는 이런 창구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퀴어여서가 아니라 누구나 소수자성을 가지고 산다고 생각해요. 그런 부분을 세심하게 살필 수 있는 안내자로서 저희의 역할이 있고요. 가장 좋은 건 굳이 연구소를 찾지 않아도 누구나 ‘차별 없는’ 금융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는 거겠죠. 그런 날을 바라며 일을 해나가려 합니다.”
장일호 기자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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