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00편 작품을 소리로 ‘번역’한 사람 [.txt]

23년 동안 7800여편의 드라마, 영화, 예능 프로그램, 연극, 뮤지컬, 미술 작품에 함께한 사람이 있다. ‘관람’만 해도 많은 숫자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 모든 작품에 한 사람의 손길이 미쳤다. 주인공은 “세상의 이야기를 모두가 즐길 수 있게 해 주는” 음성해설 작가이면서, 음성해설 성우로도 활동하는 서수연 작가다.
‘화면해설’로도 알려진 해설 서비스의 국제 표준 명칭은 음성해설이다. 영상 화면뿐 아니라 연극이나 미술관 전시 등 다양한 시각 정보를 소리로 전달하는 서비스이기 때문이다. 작가에 따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이미지들”을 “언어로 정교하게 치환”하는 음성해설은 “다층적이고 치열한 번역의 과정”이다. 번역 작업이 그러하듯, 오역이 원작을 치명적으로 훼손할 위험성을 음성해설 역시 내포한 셈이다.
성우를 꿈꾸다, 2003년 한국방송(KBS)의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걸렸네’를 시작으로 음성해설의 세계에 들어선 작가는 국내에선 생소하던 이 분야를 맨몸으로 개척해 왔다. 우리나라에 음성해설 제도가 도입된 것은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가 정부 지원을 받아 서비스를 시작한 2000년이다. 그러므로 음성해설 작가 서수연이 겪은 시행착오와 도전의 궤적을 시계열로 따라간 책은, 국내 음성해설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음성해설의 역사는 결국 ‘접근성’의 역사다. 작가는 ‘무장애’라는 표현보다 ‘접근성’이라는 단어가 변화를 만들어낸다고 강조한다. “무장애가 장애물을 0으로 만들어야 할 것 같은 완벽주의자적 부담을 준다면, 접근성은 시작하는 준비 과정부터 실행, 그리고 이후 이용자의 피드백을 수용하는 태도까지 아우르는 유연함을 가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턱이 있느냐 없느냐보다는, 끊임없이 문턱을 낮추려는 시도와 의지야말로 세상을 바꾼다는 뜻이겠다.
그 문턱을 낮추기 위해 작가가 고민하는 모습은 하나의 ‘업’을 꾸려가는 전문가의 치열함을 보여준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해설에서 ‘색상’ 묘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제주도 땅을 한번도 밟아본 적 없는 이가 시각장애인에게 거대한 오름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어떤 태도로 해설에 임할 것인가. 이런 치열한 질문을 마주할 때 독자는 음성해설 작가나 청중이 아니어도 기꺼이 고민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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