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시대, 인간의 결정권은 어디에 [.txt]

얼마 전, 인공지능(AI, 에이아이) 관련 행사에 간 적이 있다. 주최자의 축사가 기억에 남는데, 휴먼 AI 지향, AI를 인간적으로 쓰겠다는 말이 있었다. 인간 노동력과 사고력을 AI로 대체하는 행위를 축복하면서, 비인간을 인간적으로 쓴다는 건 무슨 뜻일까? 어느 시대든 ‘인간성’은 사유의 대상이지만, 인간에 필적하는 비인간의 출현이 임박하자, 모두 더 열심히 인간성을 부르짖는다. 그 의미는 모호하게 남겨둔 채로.
최근에 인간다움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하게 한 책은 역설적으로 ‘이세계’의 존재가 등장하는 판타지 ‘오염된 잔’이었다. 홍보문구에 ‘진격의 거인’과 ‘나이브스 아웃’이 언급되는데, 거대 괴물의 침입과 밀실 살인 사건의 결합이라는 면이 유사하다. 우기에 닥쳐오는 레비아탄을 막으려 방벽을 세운 카눔 제국, 사람의 몸에서 나무가 자라나 죽는 사건이 일어난다. 젊은 보조 수사관 딘과 뛰어난 통찰을 지닌 독설가 괴짜 수사관 아나가 진범을 찾고 제국의 부패를 밝히는 과정이 소설의 플롯이다.
아나와 딘의 관계에서 홈스와 왓슨을 연상하긴 쉽지만, 아나는 조사를 듣고 사건을 파악하는 안락의자 탐정에 가깝고, 몸으로 뛰며 비정한 세계에 맞서는 딘은 하드보일드 탐정과 유사하다. 식물의 유기 구조를 변형한 생명 공예를 완성한 제국의 세계관을 이해하려면 현실을 넘는 상상력이 필요하지만, 수사 과정이나 사건 진상은 정통 미스터리 문법으로 쓰였다. ‘오염된 잔’은 정교한 판타지답게 현대 사회를 거울처럼 비추고, 범죄 동기나 범인은 사회파적 성격도 띤다. 괴물 레비아탄은 인류가 물리치기 힘든 기후 위기나 지진 같은 자연재해를 닮았고, 나라가 곧 국민이라는 기치를 내세우면서도 특정 지역민을 희생해서 자신의 뱃속만을 채우려는 자본가 지배층의 욕망은 무척 익숙하다.
이 소설의 특수 설정은 식물과 인체의 변형 방식이다. 한번의 변형으로 신체 능력을 올리는 이식과 영구적으로 남아 세대를 넘는 변화를 일으키는 보강, 두 종류가 있다. 딘은 기억력 보강을 받은 인그레이버, 눈에 보이는 현장을 사진처럼 기록하는 능력을 얻었다. 반면, 아나의 변형은 수수께끼이다. 무엇을 증강했기에, 실내에서 눈을 가린 채 촉각으로 책을 읽을 수 있고, 이야기만 듣고도 사건을 파악할 수 있을까? 여기엔 트랜스휴먼의 본연적 질문이 있다. 한 존재가 의학적, 공학적으로 변형될 때 얼마나 자율성을 지닐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아나는 대답한다. “우리는 스스로가 어떤 사람이 될지 결정권을 갖고 있지. 우린 찍어내는 존재가 아니야. 변하는 존재지. 스스로 조립하는 존재라고.”

이 시대에 특히 울림이 있는 말이다. 이미 사고를 변형해서 AI에 외주 주고 판단을 집단 지성의 논리에 맞추며 사는 우리에게는 어떤 결정권이 남아 있을까? 레비아탄처럼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위협의 그림자 속에 사는 현대인, 방벽의 균열을 막기 위해서 체제의 존속을 우선하지만 여기서 불완전한 개별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이 불안에 대한 답은 없지만, 지적이면서도 따뜻한 선택을 찾아보려면 ‘오염된 잔’을 읽는 것도 좋겠다.
박현주 작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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