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과학을 도왔고 과학은 그림에 새 지평을 열었다 [.txt]
관찰과 그림으로 자연을 기록한 과학자들
“디지털 그림은 딱딱해…다시 연필 들었다”

1990년 독일 통일 뒤 새로 만든 지폐 8종 가운데 두번째 고액권인 500마르크화의 주인공은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1647~1717)이었다(최고액권인 1000마르크화의 주인공은 그림 형제). 튤립을 그리는 정물화가인 의붓아버지에게서 그림을 배운 그는 ‘새로운 꽃 그림책’과 ‘수리남 곤충의 변태’ 같은 책들을 통해 화가이자 과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과학의 역사에는 메리안처럼 그림을 직접 그리는 과학자들의 자취가 뚜렷하다. 그 자신 그림 그리는 생물학자인 이동주 전 신라대 겸임교수가 쓴 ‘그림 그리는 과학자’는 메리안을 비롯해 알렉산더 폰 훔볼트, 메리 애닝, 존 제임스 오듀본 등 미술과 과학을 겸한 이들의 세계로 독자를 안내한다. 호기심과 재미 차원만은 아니다. 과학과 그림은 뗄 수 없이 이어져 있다는 게 지은이의 생각이다. “그림은 과학을 도왔으며, 과학은 그림을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게 했다.” 지금도 새로운 생물종을 규명할 때는 그림을 그려 논문을 제출한다. “그림은 한눈에 많은 정보를 보여주기에 최적화된 방법”이기 때문이다.

면밀한 관찰을 토대로 꽃 위에 곤충을 그려 넣어 생동감을 더했던 메리안은 쉰이 넘은 나이에 남아메리카 수리남으로 탐험을 다녀온 결과를 글과 그림에 담아 ‘수리남 곤충의 변태’로 엮어 냈다. “나비의 애벌레가 식사하고 탈피하는 모습, 천적을 피하는 모습, 제비 알을 노리는 보아 뱀 등” 식물과 곤충, 다른 동물이 어우러진 생태를 역동적으로 담아낸 그림들은 러시아 표트르 대제를 비롯해 유럽 각국 귀족들과 박물관, 도서관의 필수 소장품 목록에 올랐다. 여성의 교육을 금기시했던 시대에 독학으로 길을 열어 간 그의 열정은 후세의 사표가 되었다.
남아메리카와 중앙아시아를 탐험하여 자연지리와 생태를 기록한 훔볼트는 근대 지리학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아마존 원주민으로부터 전기를 내는 물고기 이야기를 듣고 전기뱀장어의 전류를 측정한 그는 실험 상황을 화가에게 설명해 판화로 제작했다. 안데스산맥의 침보라소산을 중심으로 식물 분포와 기압, 온도 등 고도에 따른 생태적 정보를 한장에 담아낸 그의 그림은 식물지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영국 남부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메리 애닝(1799~1847)은 폭풍에 무너진 해안가 절벽의 돌들 틈에서 화석을 주워 와 집 앞 탁자에 전시하며 관광객에게 판매하곤 했다. 당시만 해도 화석이나 고생물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대였지만, 애닝은 자신이 수집한 화석에 관해 과학적 기록을 하고 그림을 그렸으며 “독자적으로 고대의 생물을 체계적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일찍이 열두살 때 어룡 두개골과 나머지 골격을 모두 발견해 인근 귀족에게 판매했으며, 스물네살 때에는 수장룡 플레시오사우루스의 완전한 골격을 발굴하고 그림으로 남겼다. 고생물학자 헨리 드 라 베슈는 애닝의 발견을 토대로 고생태의 복원도를 수채화로 그린 뒤 석판화를 제작했다. 이 석판화 ‘두리아 안티키오르’는 쥘 베른 소설 ‘지구 속 여행’에 영감을 주었고 다윈 ‘종의 기원’의 펭귄 클래식 판 표지로도 사용되었다.
‘종의 기원’ 본문에 실린 그림으로는 도표에 가까운 생명의 계통수가 유일하다. 그러나 다윈이 수집한 갈라파고스 핀치새 표본은 영국박물관의 조류학자 존 굴드에게 전달되었고, 굴드가 그린 핀치새들의 서로 다른 부리 모양은 다윈의 이론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독일의 해양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1834~1919)은 현미경으로 관찰한 해양 플랑크톤 방산충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뒤 동판화로 제작해 퍼뜨렸다. 그가 그린 100여점의 정교한 삽화를 모아 낸 책 ‘자연의 예술적 형태’(1904)는 자연과 예술의 연결을 강조하던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미국 조류 생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존 제임스 오듀본(1785~1851)은 현장 스케치와 박제술을 병행해 자연 그대로의 새들 모습을 그리고자 했다. 그는 “암컷, 수컷, 어린 새를 한장의 그림에 담아내 암수뿐 아니라 어른 새와 어린 새의 외형을 비교할 수 있게 했다.” 500종 가까운 실물 크기의 새 그림이 실린 그의 책 ‘북미의 새’는 판형이 99×66㎝로 당시로서는 가장 크고 섬세한 인쇄물이었다.

이 밖에도 메리안과 마찬가지로 식물과 곤충을 함께 그린 신사임당의 ‘초충도’, 조선 최고의 나비학자였던 남계우가 남긴 나비 그림들, 그리고 지은이 자신이 발견한 신종 생물에 관한 국제 학술지 기재 논문에 직접 그린 그림 등의 이야기가 흥미를 더한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최근에는 디지털 그림이 확산되었지만, “디지털 결과물은 손으로 그린 것보다 획일화되고 딱딱한 느낌”이어서 “결국 연필을 다시 들었다”는 지은이의 경험담은 과학 탐구와 그림의 유기적 관련성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한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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