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은행, UAE 송금 잇단 차단…정치 갈등이 무역 흔드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아랍에미리트(UAE) 계좌로 보내는 송금이 잇따라 차단되거나 지연되면서 양국 간 정치적 갈등이 금융과 무역으로 확산하는 조짐을 보인다. 걸프 지역 최대 경제권인 두 나라의 경제 협력에 이상 신호가 나타날 경우 기업들의 공급망과 교역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9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복수의 기업 관계자들은 지난 5월 이후 사우디 기업이나 개인이 두바이에 있는 기업과 개인 계좌로 송금한 자금이 별다른 설명 없이 반환되거나 장기간 지연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일부 송금은 일주일가량 보류된 뒤 송금인과 수취인 모두 별다른 안내를 받지 못한 채 그대로 반환됐다고 설명했다.
두바이에 본사를 둔 한 서방계 헬스케어 기업 임원은 수년간 거래해온 사우디 고객이 보낸 대금 세 건이 5월 중순 이후 모두 사우디 은행에서 차단됐다고 밝혔다. 그는 고객이 개인 명의로 송금을 시도했지만 역시 막혔으며, 은행에 문의한 결과 사우디 중앙은행의 지침이라는 취지의 설명만 들었을 뿐 구체적인 이유는 전달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사우디 중앙은행은 금융권이 강력한 규제 체계 아래 운영되고 있으며 특정 국가를 대상으로 한 직접적인 제한 조치는 없다고 밝혔다. 또 모든 거래는 금융 시스템의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위험 기반 심사 원칙에 따라 동일하게 처리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송금 지연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두바이의 또 다른 기업인은 사우디 거래처의 대금 지급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있다며 물품을 기다리는 고객은 있지만 결제가 이뤄지지 않아 공급 자체가 지연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우디에 물품을 공급하는 업체 상당수가 UAE에 기반을 두고 있는 만큼 이런 조치는 결국 사우디 경제에도 부담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우디와 UAE는 아랍권 최대 경제국으로 연간 교역 규모가 200억달러를 넘는 핵심 교역 상대국이다. 다수의 글로벌 기업들은 두바이를 중동 지역 거점으로 활용해 사우디 시장을 공략하고 있으며, 기업 관계자들에 따르면 양국 간 항공편 역시 여전히 높은 수요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양국 관계는 지난해 말부터 급격히 악화했다. 사우디는 UAE가 예멘에서 분리주의 세력을 지원해 사우디가 지원하는 세력에 대한 공세를 뒷받침했다고 비난했다. 사우디는 2015년 이란의 지원을 받는 후티 반군에 맞서 함께 군사 개입했던 UAE가 자국 안보를 위협했다고 주장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 갈등은 수십 년 만에 가장 큰 양국 간 균열로 평가되며, 그동안 누적돼온 경제 경쟁과 중동 지역 분쟁을 둘러싼 외교 노선 차이까지 한층 심화시켰다. 이후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이란 전쟁 국면에서는 걸프 국가들이 공동 대응에 나서면서 갈등이 다소 완화되는 듯했지만, 시장에서는 근본적인 문제는 해소되지 않았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실제로 UAE는 지난 4월 사우디가 사실상 주도해온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탈퇴한다고 발표하며 주변국을 놀라게 했다. UAE는 경제 전략과 변화하는 에너지 정책에 따른 결정이라고 설명했지만, 오랫동안 생산 할당량에 불만을 가져왔던 만큼 사우디에는 적지 않은 정치적 타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사우디 정부는 그동안 정치적 갈등이 양국의 경제·무역 관계에는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해왔다. UAE 정부 역시 경제부가 민간 기업들로부터 양국 간 송금 지연이나 이상 사례에 대한 공식적인 민원을 접수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UAE 당국은 사우디와 오랜 경제·상업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민간 부문과 지속해서 소통하고 있고 구체적인 문제가 제기되면 적절한 절차를 통해 검토하겠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실제 기업들은 우회 결제에 나서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한 UAE 사업가는 사우디에서 UAE로 직접 송금이 막히자 바레인을 거쳐 자금을 이체했다고 밝혔다. 두바이의 한 서비스 업체도 사우디 고객의 은행 송금이 지난달 취소되면서 결국 수수료 부담이 더 큰 페이팔을 이용해야 했다고 전했다. 그는 은행에서도, 사우디 거래처에서도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했고 거래 기록에는 단순히 '거래 실패'라고만 표시됐다고 말했다.
한 다국적 기업도 사우디에서 UAE 기업으로 자금을 보내는 과정에서 같은 문제를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 고위 은행 관계자는 수백만달러 규모가 아니라 소액 송금까지 중단된 사례가 있었다며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최근에는 개인들이 자신의 계좌나 가족, 지인에게 송금하는 과정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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