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않을 수 없고, 함부로 쓸 수도 없는: 이사회 AI 활용의 법적 과제 [지평 테크레이더]

경영진은 이미 AI에 많은 것을 묻고 있다. 헤드헌팅 회사 하이드릭앤스트러글스가 지난해 국내 C레벨 임원 80명을 조사한 결과, 88%가 생성형 AI를 업무에 쓰고 있었고, 활용 이유로는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 강화’(73%)가 첫손에 꼽혔다. 미국 갤럽조사에 의하면 리더급의 AI 사용률은 69%로 실무자의 40%를 크게 상회했다. 경영 판단의 도구로 AI가 이미 자리 잡은 것이다. 반면 자체 AI 가이드라인을 갖춘 국내기업은 37%에 그쳤다. 활발한 활용에 비해 거버넌스는 따라가지 못하는 셈이다.
이 틈이 가장 위태롭게 드러나는 곳이 이사회다. 이사회를 며칠 앞두고 수백 쪽의 안건 자료를 받아 든 사외이사를 떠올려 보자. 회사에 상근하지 않는 그가 제한된 시간 내에 방대한 분량을 소화할 가장 빠르고 유혹적인 방법은, 자료를 통째로 AI에 넣고 요약과 쟁점을 뽑아달라고 지시하는 것이다.
판례는 경영판단원칙으로 보호받으려면 “합리적으로 이용가능한 범위 내에서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수집·조사하고 검토”해야 한다고 요구한다(대법원 2023. 3. 30. 선고 2019다280481 판결). 책임은 커졌는데, 이를 이행할 여건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방대한 자료를 제한된 시간에 살펴야 하는 이사에게 AI는 정보수집과 분석을 한꺼번에 맡길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도구로 보일 수 있다. 시장과 경쟁사가 모두 AI로 분석하는 시대에 홀로 이를 외면한 이사가 “구할 수 있는 정보를 충분히 모았다”고 말하기도 어려워졌다. 나중에 분쟁이 생겼을 때 당시 이용가능한 도구를 충분히 활용했는지가 평가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AI 활용은 오히려 의무 이행의 한 요소로 평가될 여지도 있다.
![[제미나이]](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7/09/mk/20260709070303402sqma.png)
이사회 자료는 미공개 재무정보, 신사업 계획, 인수합병 검토안, 핵심 인사·보상 자료가 담긴 영업비밀의 집합체다. 이것을 공개형 AI에 통째로 입력하면, 회사가 비밀 유지를 위해 공들인 관리 조치가 무너질 수 있다. 부정경쟁방지법이 영업비밀의 요건으로 삼는 ‘비밀관리성’을 이사 스스로 허문 셈이 되기 때문이다. 충실의무를 다하려는 노력이 자칫 새로운 법적 부담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셈이다.
이사는 AI를 외면할 수도, 남용할 수도 없다. “주어진 정보를 충분히 검토했는가”를 묻던 책임의 잣대는 머지않아 “그 과정에서 안전하고 통제된 방식의 AI를 활용했는가”를 함께 묻게 될 것이다. 이런 딜레마를 이사 각자가 알아서 조심하라고 미루어 둘 수는 없다. ‘쓰지 않을 수 없는’ 도구라면, 이사들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도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통제된 인프라를 제공해야 한다. 어떤 자료를 AI에 입력할 수 있는지, 어떤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지, AI의 답변을 어떻게 검증하고 의사결정 과정에 남길 것인지에 관한 기준도 마련되어야 한다. 넓어진 이사의 충실의무를 뒷받침하면서도 회사의 영업비밀을 보호하는 정교한 AI 거버넌스의 구축은, AI 시대에 선진적인 이사회를 운영하고 경영진의 리스크를 방어하기 위한 과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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