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는 욕해도 현실에선 백전백승···아파트와 중산층의 ‘사회계약’은 무너졌다
박해천 동양대 부교수 인터뷰
아파트는 중산층의 사고방식…
월급쟁이 ‘내집 마련’ 모델은 이미 종말
상급지 아파트 ‘요새화’ 완료…
2030의 보수화는 이를 ‘게임 규칙’으로 수용한 결과

문: 다음 문장 속의 ‘나’는 누구일까.
“부동산 시장이 투기 열풍으로 요동칠 때면, 나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어김없이 커진다.”
“나를 겨냥한 비판의 화살들은 내 몸에 수북이 꽂혀 거대한 말 무덤을 만들지만, 나를 향한 욕망의 불도저는 막지 못한다. 나는 담론의 가상 세계에선 언제나 패배하지만, 물질의 현실 세계에선 백전백승이다.”
박해천 동양대 디자인학부 부교수의 <콘크리트 유토피아>(워크룸프레스) 속 문장으로 만든 문제다. 정답은 ‘아파트’다.
2011년 초판이 출간된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인문·문화비평 분야의 기념비적 저술이라 할 만하다. 디자인 연구자로서 박해천은 ‘아파트는 한국의 시각 문화를 어떻게 변모시켰는가’라고 자문했다. 그 결과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부동산을 넘어 아파트에 대한 인문·사회·정치·경제적 탐문이 됐다. 특히 마포아파트를 내려다보는 항공 카메라, 강남과 신도시 아파트 단지 같은 비인간을 화자로 내세운 형식은 인상적이었다. 책은 2025년 알라딘이 뽑은 ‘21세기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책의 명성을 고려하면 5년 만에 초판이 절판된 것과 그사이 개정판이 나오지 않은 것이 의외다. 그 공백기에 책은 중고 서점에서 원가 이상에 거래됐다. 책 제목을 차용한 영화도 개봉했다. 15년 만에 개정판을 낸 박해천을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 비인간 화자를 내세운 서술 방식은 지금 봐도 신선하다.
“2009년 <인터페이스 연대기>의 한 챕터에서 이런 글쓰기 실험을 처음 했다. 파시스트의 멘털리티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인텔리 중산층 출신 파시스트의 자기 정당화를 서술하는 게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나름 ‘비평적 픽션’이라 이름 붙인 방식을 아파트에도 적용해봤다. 말할 수 없거나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하는 방식으로 가장 좋아 보였다. 아파트를 둘러싼 중산층의 욕망을 연구자 관점으로 추상화해 이야기하는 방식은 부적절하다는 생각도 있었다.”
- 논문, 이론서는 물론이고 김현·김우창·박완서·김영하·정이현의 문학, 유하·강제규의 영화, 언론 기사, 테크노크라트나 건설 실무자의 회고록 등 수많은 자료를 인용했다.
“책의 기반이 된 인용의 상당수는 1990년대 초반부터 내게 차곡차곡 축적된 문화적 경험이다. 대학·대학원 다닐 때 친구들 사이엔 농담식으로 ‘이건 체크해야 돼’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 식으로 한 세대의 문화와 교양을 쌓아갔다. 스펙 쌓느라 바쁜 지금의 젊은 세대에겐 큰 사치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개정판에서는 15년 사이 중산층과 아파트를 둘러싼 학술적 논의들도 많이 반영했다.”


책은 1970년대 중후반 아파트가 분양가 상한제를 통해 중산층 육성을 위한 ‘사회계약’으로 등장하는 과정, 1990년대 초반 주택 200만호 건설과 신도시 개발이 한국 사회의 방향을 바꾸는 과정을 담았다. 분양가 상한제 같은 제도들은 특정 세대의 대졸 화이트칼라 집단에게 “취업한 후 가정을 이루고 소득을 늘리며 목돈을 저축하면 생애 주기의 특정 단계에서 ‘내 집 마련’을 통해 중산층으로 올라설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일찌감치 “아파트에 살면서 나는 아파트가 하나의 거주 공간이 아니라 사고 양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중산층의 사고방식이다”라고 적었다. 박해천은 이런 아파트를 통해 형성된 계층을 ‘신중산층’이라고 부른다.
- 책에서 아파트와 중산층의 관계를 지적했지만, 이제 중산층도 서울의 아파트를 소유하기는 쉽지 않게 됐다.
“한국 사회의 계급화가 ‘완료’에 가까운 상태라고 본다. 과거 군인 출신 대통령들이 한국 사회를 통치하기 위해 내세운 것이 중산층 모델이고, 이는 아파트를 통해 가속화됐다. 비판적 지식인은 대안으로 민중 모델을 내세웠지만, 이들 상당수도 2000년대 접어들면서 중산층이 됐다. 2006~2007년쯤 등장한 ‘강남좌파’라는 말은 그 지표였다. 1990년대 중반까지 유지되던 분양가 상한제 모델은 월급쟁이가 7~8년 저축하면 구입할 수 있는 가격으로 책정됐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이런 중산층 양산 모델은 허약하게 유지되다가 결국 사라졌다.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면 더 나은 삶을 기대할 수 있다는 건 일종의 사회계약이었다. 지난 20년은 이런 사회계약이 와해되고 각개전투가 벌어지는 과정이었다. 사실 중산층 모델도 사회적 합의가 아니라 통치 세력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졌다. 한국 사회는 합의하고 타협하는 경험이 없었고, 코로나19 팬데믹이나 ‘조국 사태’ 등을 거치며 진영논리만 난무하는 2026년이 됐다. 유럽도 20세기 복지국가 모델이 다 파기된 상태다.”

- 책에는 아파트를 갈아타며 재산 증식에 성공한 ‘1942년생 강남 1세대의 회고담’도 나온다. 이들은 대부분 사망했거나 노년층이 됐다.
“그들 자녀의 상당수는 아파트를 경유해 다양한 방식으로 자산을 증여받았다. 강남 1세대가 창안한 방식은 지금도 상위 중산층을 중심으로 교육 방식과 함께 이어진다. 2010년대만 해도 이에 대해 비판적인 분위기가 꽤 퍼져 있었는데, 여러 정치사회적 사건을 거친 젊은 세대들은 이를 ‘게임의 규칙’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일종의 자포자기, 냉소, 자기연민이 뒤섞여 있다. 이 정서의 구조가 2020년대 이후 선거 때만 되면 나오는 ‘2030 보수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 당신은 아파트 내부 구조와 가구, 전자제품 배치를 중산층의 정체성 형성 과정과도 연결 지었다. 초판 출간 이후 서울의 아파트는 여러 방식으로 고급화를 꾀하고 있다.
“아파트 실내 평면 구조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다만 2000년대 초중반 래미안, 자이, 푸르지오 같은 아파트 브랜드화 과정을 거치며 외향면에서 변화가 나타났다. 강남 주요 재건축 단지를 중심으로 리조트나 호텔을 모방한 조경, 커뮤니티 시설 등으로 차별성을 드러낸 것이다. 미국이나 홍콩에선 상류층의 ‘게이티드 커뮤니티’(외부인 출입을 통제하고 보안성을 추구하는 주거 단지)가 보편화됐다. 한국에서도 ‘상급지’라 불리는 곳은 요새화가 완료된 상태다. 요즘 외부인 출입 통제 등으로 문제 되는 단지는 대부분 경계선에 놓인 곳이다. 나는 이것이 중산층의 내부 분화, 특히 상위 중산층이 기존 중산층과 구별되는 계층적 정체성이나 라이프스타일을 구성해나가는 과정과 연결돼 있다고 본다.”
박해천은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영화 <결혼 이야기>, 삼성전자·LG전자의 광고 등을 통한 1990년대 중산층 문화의 확산을 살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아울러 201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인 삶, 소비자로서의 삶, 투자자로서의 삶이 일반화되는 과정을 아파트를 중심으로 살피는 작업도 장기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백승찬 선임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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