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성장펀드, 모험자본 ‘블랙홀’ 되나
제1금융권 자금, 국민성장펀드로 집중
미선정 PEF 운용사들 ‘버티기 모드’
자금 쏠림에 투자 생태계 복원 절실

국민성장펀드 출자사업이 국내 모험자본 시장의 자금줄을 묶어버리는 ‘블랙홀’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연기금과 공제회 등 기관출자자(LP)의 출자사업이 국민성장펀드 조성이라는 초대형 이벤트 속에 자취를 감췄다는 이유에서다.
8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최근 자본시장에서 국내 사모펀드(PEF) 운용사들이 체감하는 펀드레이징(자금조달) 분위기는 경직돼 있다. 올해 금융투자업계의 실탄이 국민성장펀드로 몰리면서, 이러한 분위기에 합류하지 않은 운용사들이 직면한 환경은 더 악화했다는 분위기다.
PEF 운용사 관계자는 “연기금과 공제회의 수시 및 정기 출자사업 제안요청서(RFP)가 최근 들어 눈에 띄게 줄었다”며 “대규모 자금이 움직이는 국민성장펀드의 매칭 출자 결과를 먼저 확인한 뒤 움직여야 리스크 관리에 용이해질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는 듯 하다”고 말했다.
이런 일련의 흐름은 정부 주도 정책사업의 상징성과 신뢰도 영향으로 풀이된다. 시장 자금줄 역할을 해왔던 LP들마저 독자적인 움직임에 나서기보다 국민성장펀드의 자금 향방을 이정표 삼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특히 민간 유동성의 핵심 축인 은행 등 제1금융권 자금이 국민성장펀드로 집중되고 있다는 점은 운용사(GP)들의 고충을 심화시키는 요인이다. 위험가중치(RWA) 부담 완화 조치가 큰 유인책으로 작용하면서 이들 ‘큰 손’ 출자자들의 시선은 한 곳으로 향했다.
그동안 은행권은 국제결제은행(BIS)이 정한 바젤 III 기준상 일반 PEF 출자 시 400%의 높은 위험가중치를 적용 받았다. 그러나 정부가 국민성장펀드에 한해 이를 100%로 낮춰주는 특례를 부여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기업 입장에서는 동일한 자금을 투입하고도 건전성 부담을 4분의 1로 덜 수 있게 된 셈이다.
명분과 실리를 모두 갖춘 제1금융권의 자금까지 국민성장펀드로 몰리면서, 정책 사업에 선정되지 못했거나 아예 지원하지 않은 PEF 운용사들의 입지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독자적인 투자 전략을 구사하거나 명확한 운용 전략을 구축한 운용사들조차 자금 매칭의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소외되는 모습이다. 결국 국민성장펀드의 거대한 흐름에 합류하지 못한 이들은 LP들의 출자 공백기를 고스란히 버텨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셈이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LP들의 출자 결정이 줄줄이 뒤로 밀리면서 올해 안에 펀드 결성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던 GP의 답답함이 커지고 있다”면서 “매칭 자금을 구하지 못해 펀드 결성이 장기화되는 악순환이 현실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자본시장 일각에서는 투자 생태계의 불균형을 우려한다. IB 업계 관계자는 “정책자금이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마중물 역할을 하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면서도 “모험자본 시장의 다양성을 지키면서도 시장에 온기가 돌게끔 하려면 출자 통로 다변화가 시급하다. 이와 함께 민간 LP들이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생태계 역시 복원돼야 할 것”이라고 짚었다. 안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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