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 아들과 한라산 19km를 걷다 [독자산행기]

강새아 부산 북구 2026. 7. 8. 07:31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백록담에서. 

한라산 백록담은 3년 만이다. 등산을 시작한 지 1년쯤 되었을 때 관음사 코스로 혼자 올랐다. 이번엔 아홉 살 아들과 함께 성판악 코스로 올랐다. 왕복 19km, 당일치기 코스로는 꽤 긴 거리다. 이날을 위해서 우리는 차곡차곡 경험을 쌓아왔다. 다섯 살에 처음 백양산 정상에서 바나나 우유를 마시며 성취감을 느꼈던 아들은 일곱 살엔 대둔산 삼선계단을 지나 마천대에 올랐고, 여덟 살엔 지리산 천왕봉, 그리고 올해 지리산 반야봉과 영남 알프스 7봉을 완등하며 준비를 마쳤다.

새벽 3시 40분에 눈을 뜨고 무거운 몸을 일으켜 준비해 둔 등산복을 입었다. 간단히 요기를 하면서 성판악 주차장으로 향했다. 6월이라 일출이 빨랐다. 들머리로 향하는 차창 너머로 제주 먼 바다 수평선이 여명에 붉게 물들었다.

설렘과 긴장을 안고 도착한 성판악휴게소에서 신분 확인을 마친 후 우린 한라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각자의 배낭을 메고 천천히 걸음을 내딛으며 몸과 정신을 깨웠다. 초록으로 가득한 숲과 울창한 나무들, 그리고 발밑의 돌 하나하나까지 그동안 다녔던 산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그림과 함께 알기 쉽게 표시된 이정표가 짧은 구간마다 나타나 길을 확인할 수 있어 마음이 한결 든든했다. 새로 산 시계로 실시간 고도와 거리를 알려 주니 아이의 발걸음이 가벼워졌고, 금방 속밭대피소에 도착해서 간식을 먹었다. 전날 솥밥을 먹은 탓에 자꾸만 속밭대피소인지 '솥밥대피소'인지 발음이 헷갈려 둘이서 까르르 웃었다.

거친 돌계단을 한참 오르다 데크 계단이 나오면 그마저도 고맙게 느껴졌다. 중간중간 해발고도를 알려 주는 바위를 만나는 재미도 있었다. 숫자가 하나씩 커질수록 정상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에 힘이 났다. 묵묵히 자신의 속도로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진달래밭대피소에 도착했다.

6월이라 더위를 걱정해 생수 500ml 8병을 배낭에 챙겨 갔다. 그런데 대피소에서 만난 분이 2리터 생수병을 꺼내는 걸 보고 웃음이 났다. 그래도 등산에서는 부족한 것보다 남는 편이 마음이 훨씬 편하다.

지리산에서 아들과 함께.

적당히 휴식을 취한 뒤, 우리는 다시 백록담으로 향했다. 관음사 코스보다는 수월하다지만, 성판악 코스 또한 만만치 않았다. 진달래밭대피소를 지나 조금 더 오르자 드디어 조망이 펼쳐졌으며, 쾌청한 날씨가 그 풍경을 더욱 빛나게 했다. 말라 서 있는 고사목이 오히려 더 근사하게 느껴졌다. 아이는 눈앞의 장엄한 절경에 연신 감탄하며 필름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백록담을 목전에 두고 더욱 숨이 가빠졌다. 하산하는 사람들의 응원을 받으며 조금만 더 힘을 내어 마침내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는 등산객들로 붐볐고, 정상석에서 인증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이 길게 이어졌다. 아이는 망설임 없이 백록담으로 향했다.

"엄마! 백록담에 물이 가득 있어!"

며칠 전 비가 내려 물을 머금은 백록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함께하지 못한 남편과 영상통화도 하고, 사진도 찍은 뒤 자리를 잡아 점심을 먹었다. 산 정상에 오르면 언제나 그렇듯 내려가기가 아쉬워진다. 하지만 갈 길이 멀기에 마음속으로 다음을 기약하며 하산을 시작했다.

"잘 있어. 다음에 또 올게!"

우리는 늘 하산할 때면 그렇게 인사를 건넨다.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한 걸음 한 걸음에 집중하며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등산보다 하산이 더 어렵게 느껴진다. 이미 많은 거리를 걸어 발과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했고, 목표를 달성한 뒤라 하산길은 어딘가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이와 함께 하산할 때는 여러 가지 놀이를 하며 걷는다. 끝말잇기부터 말꼬리놀이까지, 그리고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군대놀이'도 빠질 수 없다. 실제 군대를 가본 적은 없지만 "대령님! 다음 미션은 무엇입니까?" 하고 주고받다 보면 긴 하산길도 금세 지나간다.

진달래밭대피소에 다시 도착해 이번에는 충분히 쉬어 가기로 했다. 단단히 조였던 등산화를 풀고 양말도 새것으로 갈아 신고, 간단히 마사지도 하며 지친 발을 달랬다. 오를 때는 힘들어도 성취감과 뿌듯함이 밀려오고, 하산길에서는 늘 다음 산을 생각하게 된다. 아이에게 다음 산을 물었더니 우리 동네 산, 금정산이라고 한다. 이유는 "처음부터 다시 해보고 싶어서"라고 했다. 나도 한 달 전 무박 지리산 성중종주에 도전했다가 중도 하산했을 때 부족함을 절실히 깨달았고, 기초부터 제대로 다지기 위해 PT 수업을 등록했다. 우리는 어쩌면 같은 것을 느꼈나보다.

속밭대피소를 지나 어느덧 마지막 4km를 앞두고는 경보하듯 빠르게 걸었다. 얼른 하산해 모자랐던 잠을 자고 싶고, 맛있는 하산식을 먹고 싶은 마음, 그리고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가 개운하게 씻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올해의 목표 중 하나를 해냈다. 날머리에 서면 그저 감사하다. 아들은 지리산 성중종주도 하고 싶다고 한다. 기회가 된다면 둘이서 느림보 산악회를 꾸려 배낭을 메고 다시 오르고 싶다.

아이와 등산을 한다는 건 배낭의 무게도, 시간도 평소보다 더 무겁고 길어진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함께 땀을 흘리고, 이정표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안부를 물으며 걷는 그 과정이 행복하다. 곧 10대가 되는 아들은 언젠가 엄마보다 친구가 더 좋은 날이 오겠지만, 그때도 마음을 내어준다면 함께 걷고 싶다.

한라산에서 아들과 함께. 

월간산 7월호 기사입니다.

Copyright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