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中은 레노버 뚫고 美·日은 HBM 동맹… 메모리 ‘시간전쟁’
마이크론, 日 정부 지원에 증설
공급 과잉땐 초격차 기술력 필요
2028년 이후 해외공급 확대 변수

메모리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중국 메모리 반도체가 글로벌 PC 공급망에 본격 진입하기 시작했다. 메모리반도체 세계 3위인 마이크론은 일본 정부와 손 잡고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시설 증설에 나섰다.
인공지능(AI) 특수로 한국 메모리 기업들이 사상 최대 호황을 누리는 사이에 중국은 범용 메모리 시장을, 미·일 동맹은 첨단 메모리 시장을 동시에 공략하며 한국을 압박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 같은 반도체 패권다툼에 맞서 "그야말로 오직 속도전이 중요하다"며 '3대 메가 프로젝트' 발표 일주일 만에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부지를 6일 확정했다.
글로벌 빅테크의 AI 데이터센터 증설 경쟁으로 반도체 호황은 적어도 2028년까지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하지만 그 이후는 보장할 수가 없다.
민관이 힘을 합쳐 전국을 반도체 클러스터로 만든다는 대전략이 나온 데에는 전체 수출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K-반도체'의 경쟁력에 국운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현실이 담겨 있다.
이날 업계에 따르면, 중국 반도체 제조업체인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는 최근 레노버의 글로벌 판매용 일부 노트북 모델에 자사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를 탑재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산 SSD가 글로벌 주요 PC 제조사의 완제품에 탑재된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다. 레노버는 전 세계 PC 및 노트북 시장에서 다년간 출하량 기준 압도적인 1위로 2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레노버는 그동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키옥시아 등 글로벌 메모리 업체를 중심으로 부품을 조달해 왔다. 이번 사례는 중국 메모리 업체가 자국 시장을 넘어 글로벌 공급망으로 활동 범위를 넓히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이 수익성이 높은 HBM과 서버용 D램 생산에 역량을 집중하면서 범용 메모리 공급은 상대적으로 빠듯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D램과 낸드플래시 가격이 급등하면서 PC 제조사들의 원가 부담이 커졌고 공급망 다변화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HP와 델이 중국산 메모리 제품에 대한 기술 검증을 진행 중이며, 애플도 중국 판매용 제품을 중심으로 중국 메모리 적용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메모리 시장은 AI 특수를 바탕으로 전례 없는 호황을 이어가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올해 2분기 글로벌 메모리 시장 규모가 전분기 대비 60% 이상, 전년 동기 대비 380% 증가한 350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D램과 낸드플래시 가격도 모두 전분기 대비 50% 이상 상승한 것으로 집계됐다. 미국 투자은행(IB) 제퍼리스 역시 메모리 가격이 올해 3~4분기에도 전분기 대비 30~50% 추가 상승할 것으로 내다봤다.
중국은 이 같은 호황을 발판으로 생산능력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YMTC는 공격적인 증설에 힘입어 올해 1분기 글로벌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점유율 13%를 기록하며 1년 전보다 5%포인트(p) 끌어올렸다.
중국 최대 D램 업체 창신메모리(CXMT)도 상하이 증시 상장을 통해 295억위안(약 6조6500억원)을 조달한다는 계획이다. 조달한 자금은 상하이 신규 팹 투자와 생산능력 확대에 투입될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메모리 기업들은 미국의 첨단 반도체 수출 규제로 최첨단 HBM 시장 진입에는 한계가 있지만, 범용 메모리 시장에서는 가격 경쟁력과 대규모 내수 시장을 앞세워 영향력을 빠르게 키우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과 일본도 메모리 패권 경쟁에 가세했다. 마이크론은 지난 4일(현지시간) 일본 히로시마 공장에서 신규 제조동 기공식을 열고 총 1조5000억엔(약 14조원)을 투입해 2028년부터 HBM 등 차세대 메모리를 생산할 예정이다.
일본 정부는 투자금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최대 5360억엔(약 5조원)을 지원한다. 일본은 TSMC 구마모토 공장과 라피더스의 2나노 프로젝트에 이어 첨단 메모리 생산기지까지 확보하며 반도체 공급망 재건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한국도 대응에 나서고 있다. 삼성전자는 평택 P4를 비롯해 P5 생산라인을 순차적으로 확대하고 있으며, SK하이닉스도 청주 M15X와 M17 구축을 추진 중이다.
최근 정부와 삼성, SK하이닉스는 최근 서남권에 대규모 반도체 생산거점을 조성하는 메가 프로젝트를 발표하며 미래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생산 기반 확보에도 나섰다.
다만 업계는 현재의 메모리 슈퍼사이클이 영원히 이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제퍼리스는 AI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는 글로벌 빅테크들의 장기공급계약(LTA)으로 당분간 공급 부족과 가격 강세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면서도 "미국과 일본, 중국, 한국의 신규 생산시설이 본격 가동되는 2028년 이후에는 생산능력 확대와 수요 증가세 둔화가 맞물리며 평균판매단가(ASP)가 하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 메모리 업체 역시 기술 격차로 당장 시장 판도를 흔들기는 어렵지만 2028년 이후 해외 공급 확대가 본격화하면 새로운 변수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예상대로면 한국 반도체의 미래는 2028년 이후에도 주도권을 지킬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만약 공급과잉이 시작되더라도 초격차 기술력과 수율을 앞세워 경쟁자들을 누르지 않는 이상에는 과거 일본의 엘피다 등이 반도체 치킨게임에 무너졌던 전례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재현할 수도 있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이에 대응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소재부터 팹리스까지 이어지는 반도체 벨류체인 강화와 함께 HBM의 뒤를 이을 차세대 AI용 반도체 개발, 패키징 공정 강화 등 '초격차' 유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김기태 SK하이닉스 HBM세일즈앤마케팅 담당 부사장은 최근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에서 "현재 생산력 극대화에도 불구하고 고객 수요를 100% 충족하기 어려워 일부 경쟁사의 진입이 예상된다"면서도 "성능과 양산성, 품질을 기반으로 한 리더십과 주도적 공급사 지위를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상현 기자 ishsy@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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