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병수당·유급병가’가 절실한 또 다른 이유

정부가 2022년부터 시작한 상병수당 시범사업을 내년 상반기에도 실시하고 내년 하반기에 본 제도를 도입할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국정과제인 상병수당 제도 시행이 늦어지고 있고, 유급병가 도입은 국정과제에 포함되지 않으면서 거론조차 되지 않고 있다. 그런 가운데 최근 상병수당·유급병가 제도 공백의 아쉬움이 두드러지는 일이 있었다.
고용노동부가 근로복지공단에 '업무상질병의학자문위원회'를 두는 내용의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 시행령 개정을 추진하려다 노동·사회단체들의 반발에 부딪혀 중단한 일이다.
노동부 추진 의학자문위 '무산'
노동부가 지난달 입법예고했던 시행령 개정안에서 의학자문위의 역할은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의 개선에 필요한 사항 자문"이었다. 지금은 수시로 연구용역을 통해 업무상 질병 인정기준을 개선하고 있는데 정기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의학자문기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중대재해전문가넷, 노동건강정책포럼, 민주노총 등은 노동부에 의견서를 보내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의사나 질병 전문가들로만 이뤄진 의학자문위에서 논의하면 업무상 질병 인정기준이 '규범적 판단'이 아닌 '의학적 판단'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는 우려였다. 규범적 판단은 질병과 업무와의 인과관계만 보는 것이 아니라 노동시간, 작업환경, 유해물질 노출 수준, 사업주 예방조치, 역학적 근거, 사회적 보호 필요성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다. 그동안 근로복지공단이 업무상 질병 여부를 판단할 때 의학적 판단에 주로 기댄 게 사실이다. 법원 판례도 규범적 판단을 강조하는 흐름이 굳어지고 있고, 정부는 규범적 판단 법제화를 국정과제에 포함했다.
노동사회단체의 반발에 노동부는 "의학자문위에서 업무상 질병 인정기준 개선방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종 발암물질 발견 등 의·과학적 판단을 기반으로 논의사항을 발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논란은 계속됐다. 노동부는 결국 의학자문위 신설 부분만 뺀 채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업무상 질병 인정기준 개선은 노사단체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산재보험보상정책전문위원회, 산재보상보험 및 예방심의위원회에서 논의하기로 했다.
이번 논란은 업무상 질병 인정기준을 놓고 의학적 판단과 규범적 판단이 충돌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의학적 판단 vs 규범적 판단?
노동안전보건단체들이 의학자문위 신설에 반대했지만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존재한다. 노동부가 설계한 의학자문위 역할은 발암물질을 포함한 유해물질이 업무상 질병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 데이터화하는 것이다. 업무상 질병 인정기준을 만드는 데 활용할 일차적인 자료를 만드는 것이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업무와 인과관계가 있는 것으로 분류된 질병의 경우 역학조사를 거치지 않고 추정의 원칙 등을 통해 빠르게 산재로 인정하자는 취지다. 또한 같은 질병인데도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나 법원이 업무상 질병 여부를 달리 판단하는 사례가 적지 않은데, 기준을 세워 일관성 있게 판단할 수 있는 기초자료를 제공한다는 의도라고 한다.
김형렬 서울성모병원 교수(직업환경의학)는 "의학자문위는 의학에만 기반해서 의사들로만 업무상 질병 인정기준을 만들겠다는 게 아니라, 업무상 질병 여부 판단에 기준이 될 수 있는 일관성 있고 과학적인 기초자료와 새로운 직업병 판단의 근거를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며 "언제까지 하나하나의 사건을 놓고 산재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고 되물었다. 김 교수는 "의사만 자문위에 들어가는 게 문제였다면 법률가 등이 참여하는 것도 가능했을 텐데 상당히 아쉽다"고 말했다.
손진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소장도 "의학과 과학으로 쌓아온 업무와 질병 간 관계 기초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하기 위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규범적으로 업무상 질병 여부를 판단하더라도 일차적으로 의·과학적인 규명이 필요하기 때문에 의학자문위 신설 그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손 소장은 다만 "의학자문위가 업무상 질병 인정기준을 결정하는 구상이 아닌데도 상세하게 설명되거나 투명하게 전달되지 않아 안전보건단체들의 오해를 살 만했다"고 지적했다.
노동부 관계자도 "소통이 부족했다"며 "불필요한 논란과 오해는 피하고자 일단 의학자문위 신설 추진을 중단했다"고 설명했다.
산재보상 못 받으면 생계유지 어려워
안전보건활동 산재 인정 여부에 몰려
의학자문위 신설이 무산된 배경에는 노동사회단체들의 안전보건 활동이나 우리나라의 직업병 논쟁이 '산재보상' 여부에 지나치게 몰려 있고,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는 구조가 있다.
산재노동자가 질병에 걸려 산재를 신청하면 업무와 질병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의료기관의 특별진찰, 연구기관의 역학조사, 업무상질병판정위 등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 2024년 기준 평균 산재처리 기간이 227.7일이나 됐고, 길게는 4년까지 걸리는 사건도 있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몸이 아파 일을 하지 못하는 상태까지 가게 되면 곧 생계 문제로 이어지게 된다. 안전보건단체가 산재인정 확대와 기간 단축 등에 시간과 비용을 쏟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렇게 되면서 산재예방을 위한 활동과 사업 여력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는 우려가 있다.
산재 인정기준 완화를 요구하는 안전보건단체들은 직업병에 대한 신속한 산재보상이 산재예방의 지름길이라고 보고 있다. 산재가 확인되면 노동자의 질병을 부른 노동조건과 유해요인을 파악할 수 있어 같은 유해요인에 노출된 노동자들을 보호할 수 있다는 얘기다. 다만 이런 효과를 보려면 '산재 인정→정부의 위험 공개→정부와 사업주의 원인 조사 및 개선'으로 이어지는 제도적 장치가 뒷받침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의학자문위 같은 상설연구 조직의 필요성이 커진다는 의견도 있다.
상병수당·유급휴가 제도 부재
산재보상과 부담 나눠 가져야
우리나라 직업병 논쟁이 산재보상 여부에 집중되는 근본적 이유로 제기되는 것이 상병수당·유급병가 제도의 부재다. 업무 때문에 질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임금노동자와 비임금 노동자까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제도가 상병수당과 유급병가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런 제도에 공백이 생기면서 신속한 산재보상만이 아픈 노동자들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편이다. 반면 외국의 경우 상병수당과 유급병가 제도가 안착해 있어 산재보험과 노동자 생계 유지에 드는 부담을 분담하고 있다.
김형렬 교수는 "보통 유럽 등이 우리나라보다 산재 인정기준이 완화돼 있다고 오해하지만,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하는 유해물질 범위와 노출기준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까다롭다"며 "그런데도 사회적 보장제도인 유급병가와 상병수당을 통해 산재 노동자들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지금처럼 개별사건 심의 중심인 산재보장 제도는 유지되기 어렵다"며 "한편에서는 상병수당 같은 보편적 사회보장을 강화하고 한편에서는 의학자문위 설립 같은 일부 시스템 변화를 병행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상병수당과 유급병가 제도를 도입하면 노동자 생계 유지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산재예방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다는 기대도 있다. 노동자들이 생계 걱정이나 긴 역학조사에 대한 부담 없이 검사·진료에 집중하면서 질병과 업무와의 인과관계를 밝힐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얘기다.
손진우 소장은 "산재보상 문턱을 넘지 못하면 아파도 마음 편히 쉴 수 없는 현행 제도 때문에 안전보건 활동가들이 산재보상을 받을 수 있냐 없냐라는 사후적 대응에 집중하고 있다"며 "상병수당·유급휴가 제도를 도입하면 안전보건 활동이 산재예방 활동으로도 더 많이 이어질 수 있는 여력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Copyright © Copyright © 2026 매일노동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