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돌린 숫자에 분노하는 이유 [한겨레 프리즘]


정혁준 | 전국팀장
숫자는 동서양을 걸쳐 특정한 문화적 약속이나 상징으로 쓰여왔다. ‘3’은 동양에서 하늘·땅·사람(천지인)의 조화를 뜻하며 안정감을 주는 숫자로 여겼다. ‘7’은 서양에서 행운이나 완성을 상징했다. 숫자는 지역마다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4’는 한·중·일에서 ‘죽을 사’와 발음이 같아 기피하는 숫자였지만, 서양에선 방위(동서남북)나 계절(4계절)처럼 세상을 구성하는 틀로 인식됐다. ‘13’은 서양에서 불길한 숫자로 유명하지만, 고대 마야 문명에선 성스러운 숫자였다.
과학과 철학에도 숫자는 활용됐다. ‘1.618’이라는 숫자는 낯설어도 ‘황금비’라는 개념은 널리 알려져 있다. ‘황금비’를 뜻하는 숫자인 ‘1.618’은 자연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비율로, 수학적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숫자로 쓰였다. 휴대폰·반도체·인공지능(AI)에서 숫자 ‘0’과 ‘1’은 이진법으로 정보를 처리한다. 숫자 ‘0’은 고대 인도에서 처음 고안돼 아랍을 거쳐 전세계로 전파됐다. 아무것도 없음을 뜻하지만 모든 가능성을 품은 숫자이기도 하다. ‘0’이라는 개념이 도입되면서 우리는 무한히 큰 수와 작은 수를 체계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됐다. 인류 수학사에서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철학적으로는, 동양에선 ‘0’을 ‘비어 있기에 모든 것이 채워질 수 있다’는 존재론적 성격으로 바라보았지만, 서양에선 ‘0’을 ‘존재와 대비되는 결핍이자 실존의 거울’이라는 인식론적 성격으로 여겼다.
나라마다 좋아하는 숫자가 있는데, 대표적인 게 중국인의 ‘8’ 사랑이다. 이 숫자의 중국 발음인 ‘바’(八)가 ‘돈을 벌다’라는 뜻인 파차이(发财)의 ‘파’와 유사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은 2008년 8월8일 저녁 8시8분8초에 열렸다. 중국이 ‘8’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이벤트인 셈이다. 중국 자동차 번호는 숫자가 5개로 구성되는데, ‘88888’같이 ‘8’만 모인 경우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번호로 인정받는다. 이런 자동차 번호는 경매에서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억 단위로 낙찰되기도 한다. 이처럼 중국에서 ‘8’은 단순히 양을 세는 도구를 넘어 부자와 권력이라는 강력한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숫자의 상징성은 최근 우리나라에서 특정 집단의 욕망과 결합해 범죄로 나타났다. 광주광역시 서구는 지난달 17일 차량 등록업무를 맡은 전현직 공무원 14명을 자동차관리법 및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로 적발했다. 이들 공무원은 자동차 등록대행업체 청탁을 받고 이른바 황금(골드) 번호라 하는 4자리 반복 번호(5555·4444)나 천·백 단위 번호(9000·5000), 상징적 번호(1004·9111) 등을 불법적으로 확보했다. 이들은 황금 번호가 나오면 이를 가로챈 뒤 대행업체 요청이 있을 경우 해당 번호를 넘겨주었다. 이 과정에서 식사 접대 등을 받으며 업체와 유착 관계를 맺었다. 광주 서구는 지난 1월 국민신문고에서 황금 번호 등록과 관련해 위법 사안을 조사해달라는 민원을 접수한 뒤 3년 동안 등록된 자동차번호 25만건을 조사해 350여건을 적발했다.
우리나라의 자동차 번호는 ‘공정성’과 ‘투명성’을 위해 무작위 배정을 원칙으로 한다. 자동차 등록 절차를 밟을 때, 컴퓨터 시스템은 자동차 번호 10개를 무작위로 뽑아 보여주고,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황금 번호는 좀처럼 배정되지 않았다. 이들 공무원처럼 여러 곳에서 황금 번호를 빼돌렸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공공 행정 서비스를 사적 이익을 위한 카르텔로 전락시킨 이런 범죄에 많은 시민이 분노하고 있다. 황금 번호를 가로챘기 때문만은 아니다. 신뢰를 바탕으로 운영돼야 할 행정 시스템의 근간인 ‘공정성’과 ‘투명성’이 뒷거래로 팔려나갔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번 사건은 숫자에 덧씌워진 그릇된 특권 의식이 공공 행정의 신뢰를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드러내며, 우리 사회가 직면한 공정성의 문제를 다시 되새기게 했다.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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