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 비키겠지” 깜빡이 없이 훅… 4대 중 1대는 안 지켜
홍은사거리 41대 중 3대만 점등… 위반 공익신고 年45만건 ‘상위권’
‘30m 앞에서 켜기’ 단속 어려워… “켜면 손해” 잘못된 얌체 인식도
“교육 강화해 문화로 정착시켜야”

출퇴근할 때마다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다 보니, 박 씨는 퇴근 후엔 통근길 블랙박스 영상을 돌려 보며 깜빡이 위반을 안전신문고에 신고하는 게 일상이었다. 하루에 3건 넘게 신고한 적도 있다. 그러나 곧 한계를 느꼈다. 박 씨는 “한 달쯤 꾸준히 신고하면 경고장을 받은 차들이 안 보이거나 (안 켜던 버릇이) 고쳐지곤 했다. 하지만 한 달만 지나도 원래대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상습 위반이 뻔한데도 경고 조치만 하는 것도 답답했다”고 덧붙였다.
● 양심에만 기댄 단속, 좌회전 24%는 안 지켜

하지만 깜빡이를 꼬박꼬박 켜는 운전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한국교통안전공단 교통 문화 실태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운전자의 깜빡이 점등률은 75.7%에 그쳤다. 좌회전할 때 깜빡이를 켰는지 관측한 결과다. 운전자 4명 중 1명꼴로 깜빡이를 켜지 않았다는 뜻이다. 신호를 지키는 비율(96.7%)이나 안전띠를 매는 비율(85.4%)에 한참 못 미친다.
실제로 지난해 경찰청에 접수·처리된 교통법규 위반 공익신고 가운데 ‘방향지시등 미점등’은 45만3161건으로 전체의 13.1%를 차지해 신호 위반, 차로 변경 위반에 이어 3위였다. 2021년 52만2436건으로 2위에 오른 뒤로 줄곧 상위권이다.
취재팀이 지난달 17일 서울 서대문구 홍은사거리를 지켜본 결과도 다르지 않았다. 10여 분간 좌회전 차로 두 곳을 지난 41대 중 미리 왼쪽 깜빡이를 켠 차는 3대뿐이었다. 7대는 좌회전과 동시에 켰고, 나머지 31대는 아예 켜지 않고 그대로 좌회전해 빠져나갔다. 지난해 교통 문화 실태 조사에서 이 지역 깜빡이 준수율은 63.0%로 서울 자치구 가운데 가장 낮았다. 회전과 동시에 켠 경우까지 준수로 봤는데도 그랬다.
깜빡이를 켜는 운전자가 오히려 손해를 보는 분위기도 있다. 박 씨는 “차로를 바꾸려고 깜빡이를 켜고 다가서면 오히려 자리를 안 내주고 앞차에 바짝 붙는 경우가 있다”며 “켜도 안 비켜주니까 일부러 안 켜게 된다”고 말했다. 임채홍 삼성화재 교통안전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깜빡이를 켜면 무조건 끼어들 수 있다고 여기는 운전자도 있고, 켜는 사람이 손해라는 인식도 섞여 있다”며 “이런 분위기가 최근 더 심해지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깜빡이를 켜지 않으면 승용차 기준 범칙금 3만 원이 부과된다. 하지만 단속은 사실상 어렵다. 도로교통법은 일반도로에서 차로를 바꾸기 30m 앞에서부터 깜빡이를 켜도록 정한다. 고속도로에서는 100m 앞이다. 그러나 경찰이 그 거리를 눈으로 재서 잡아내기란 쉽지 않다. 서울경찰청 관계자는 “차량이 규정 거리에 맞춰 깜빡이를 켰는지 경찰관이 곧바로 가려내기 어려워, 범칙금을 매기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말했다.
결국 깜빡이는 운전자의 양심에 기댈 수밖에 없다. 권지은 한국교통안전공단 책임연구원은 “과태료 부과 항목이 있어도 안 걸리면 그만이라는 게 도로교통 분야의 준법 의식”이라며 “단속하지 않으면 결국 시민의 양심에 기대야 하는 규정이라, 깜빡이 점등률은 그만큼 운전 문화의 수준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말했다.
● ‘일반도로 3초, 고속도로 5초’ 교육이 먼저

전문가들은 깜빡이를 선택적으로 켜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지켜야 할 습관’으로 정착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임 연구원은 “좌회전 차로에선 ‘가는 방향이 정해져 있으니 깜빡이가 필요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가령 맞은편에서 우회전해 들어오는 차가 있다면 깜빡이는 필요한 정보”라며 “언제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는 도로에서 지레짐작으로 깜빡이 규정을 어겨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깜빡이는 제때, 제대로 된 방향으로 켜는 게 중요하다. 핸들을 돌리는 방향에 맞춰 켠다고 생각하면 쉽다. 예컨대 주유소에서 나와 큰 도로로 우회전해 합류할 때, 도로 위 차들이 보라고 왼쪽 깜빡이를 켜는 것은 잘못이다. 임 연구원은 “운전자 입장에서 위험하게 느껴지는 도로 위 차들을 향해 신호를 주는 게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방향을 바꾸는 동시에 켜는 것은 ‘미리 알린다’는 취지에 맞지 않는다. 현행 도로교통법은 거리(30m·100m)를 기준으로 제시하지만, 시간으로 바꾸면 더 와닿는다. 도로교통공단은 일반도로에서는 최소 3초, 고속도로에서는 최소 5초 전에 깜빡이를 켤 것을 권한다.
전문가들은 단속이 어려운 영역인 만큼 교육과 인식을 바꾸는 게 먼저라고 입을 모은다. 정 연구원은 “안전띠 미착용 등과 달리 깜빡이는 경찰이 하나하나 단속하기 어렵다”며 “문화 조성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홍보와 캠페인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찰청은 깜빡이를 올해 공익광고 소재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권 연구원은 “깜빡이는 제한 속도나 정지선처럼 교통 안전 표어로도 잘 쓰이지 않을 만큼 당연하게 여겨져 오히려 교육에서 빠지기 쉽다”며 “기본 교통 교육에 깜빡이를 분명히 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깜빡이는 차끼리 주고받는 신호인 만큼, 도심에서 자주 보이는 버스나 택시 뒤에 홍보 문구를 붙이거나 버스, 택시의 솔선수범을 유도하는 방법도 제안했다.
특별취재팀
▽팀장 전남혁 사회부 기자 forwar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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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혁 기자 forwar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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