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활한 바다 앞 비로소 작아진 상처… 파국적 경험 後 다시 살아가기[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2026. 7. 5.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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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유레카’ 속 회복의 풍경
버스 인질극에서 살아남은 세 사람을 그린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영화 ‘유레카’. 사진 출처 IMDb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그러나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아니, 그런 적 없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운이 좋다. 그러나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영화 ‘유레카’의 주인공들은 당신만큼 운이 좋지 못했다. 영화가 시작하면 소녀 코즈에가 “커다란 쓰나미가 온다. 언젠가 반드시, 모두 없어질 것이다”라고 독백을 한다. 이 소녀는 어쩌다가 저런 무서운 독백을 하게 됐을까. 영화의 이어지는 부분은 바로 이 질문에 답한다.

마을버스 한 대가 유유히 자기 갈 길을 가고 있다. 운전사 사와이가 맨 앞자리, 승객 몇 명이 중간, 그리고 나오키 남매가 맨 뒷자리에 앉아 있다. 오빠 나오키는 나른하게 만화책을 펴 든다. 누이동생 코즈에가 함께 보려고 고개를 들이밀지만, 나오키는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만화책을 읽는다. 이상한 일이라고는 일어나지 않은 그저 평범한 일상의 순간. 그 순간을 지날 때는 그것이 행복인 줄 모르지만, 돌이켜봤을 때는 그야말로 진정한 행복이었다고 기억하게 되는 순간, 바로 그때 운전사와 승객들은 예상치 못한, 그러나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된다.

버스 인질극에서 살아남은 세 사람을 그린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영화 ‘유레카’. 사진 출처 IMDb
정장을 차려입은 한 남성이 버스에 오른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승객들에게 총을 겨누고 인질극을 시작한다. 탕, 탕, 탕. 대낮의 햇볕 아래 승객들이 한 명 한 명 총을 맞고 쓰러져 간다. 출동한 경찰의 총격을 피하기 위해 신문으로 버스 창문을 모두 가린다. 애써 창문을 가린 다음에 그는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맑은 공기가 마시고 싶군.” 바깥 공기를 마시기 위해 버스에서 내린 그 남자는 예상대로 경찰의 총격을 받고 쓰러진다. 대낮의 햇볕 아래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그는 왜 이런 일을 벌인 것일까. 우리는 알 수 없다. 본인인들 알까. 인질극을 벌였다는 점에서 그는 1988년 서울에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외치며 인질극을 벌였던 지강헌을 닮았다. 전국에 중계된 그 인질극을 본 사람들은 그 말을 통해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이 그 인질극의 원인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알 수 없다. 지강헌과 달리 그는 흥분 상태가 아니다. 그 남자는 “돈이 있으면 무죄, 돈이 없으면 유죄”라고 외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어차피 인간은 결국 죽는다”라고 독백을 하거나, “자신과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냐”고 승객에게 물어본다.

그는 대체 왜 인질극을 벌인 것일까. 이 모호함은 생존자들에게 오히려 더 깊은 정신적 상흔을 남기는 것 같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했다면 소녀 코즈에는 사회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이 되었을지언정, “커다란 쓰나미가 온다. 언젠가 반드시, 모두 없어질 것이다”라고 독백을 하는 사람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맑은 공기를 마시겠다고 버스 밖으로 나간 범인은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다. 자, 위기는 진정됐고 일상은 회복됐다. 단, 그때 버스에 탔던 승객들은 예외다. 모두 죽었고, 운전사 사와이와 나오키 남매만 살아남았다. 세 사람은 그전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3시간 38분에 이르는 러닝타임 대부분이 이 세 사람이 이 끔찍한 경험을 이고서 어떻게 삶을 견디는지 보여주는 데 할애된다. 그들은 과연 자신이 있던 일상 속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이 세 사람은 원래의 삶을 복구하는 데 차곡차곡 실패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그러나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경험이었던 것이다. 운전사 사와이는 고향을 떠나 2년 동안 이곳저곳을 전전했으며 살인사건 용의자로 몰리기도 했고, 그의 가정은 결국 파괴됐다. 나오키 남매는 세간의 관심에 시달리다가 실어증에 걸렸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가정폭력을 피해 집을 떠났다. 남겨진 아버지는 죽었고, 친척들은 아버지의 사망보험금을 노린다. 결정적으로 세 사람 모두 그 인질 사건으로부터 정신이 자유롭지 못하다. 마침내 사와이가 제안한다. 자, 떠나자.

그때부터 이 영화는 로드무비가 된다. 그들의 여행은 그 결정적 체험의 역사를 다시 쓰는 행위다. 그 사건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간다. 바로 그 지점에서 사와이는 버스를 몰고 집으로 가는 대신 바다로 향한다. 바다로 향하는 여행이라니, 너무 진부하지 않냐고? 그러나 종착지가 집이 아니라 바다여야 할 이유가 있다. 그들이 집으로 향하지 않는 이유는 이미 일어난 일을 없던 것으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깨진 그릇을 원상태로 돌릴 수 없는 것처럼.

긴쓰기는 도자기의 깨진 틈을 옻칠과 금으로 이어 붙여 예술로 승화시키는 일본의 전통 수리 공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남은 일은 일본의 도자기 복원 기법에서 착안한 긴쓰기(金継ぎ) 예술처럼 그 상처를 싸안아 예술로 만드는 것뿐이다. 즉, 그 압도적 경험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 그 압도적인 경험에 압도되지 않는 것뿐이다. 압도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압도적인 경험을 전체가 아니라 부분으로 만들어 줄 더 큰 전체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간다. 바다는 무엇이든 사소하게 만들어 주는 곳이니까.

바다로 떠난다고 모두가 트라우마를 치유하는가. 그렇지 않다. 바다로 가는 여정에서 오빠 나오키는 여전히 살인의 망령에 사로잡힌 것으로 판명되는 한편, 누이동생 코즈에는 폴라로이드 사진기로 생존자들을 찍는다. 그렇게 찍음으로써 벌어진 사태를 재현하고, 그 재현을 통해 그 압도적 사태는 객관화된다. 그리하여 바다에 도착했을 때, 코즈에는 마침내 거대한 시야를 얻는다. 그 시야를 반영하듯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들을 사소하게 만드는 광활한 풍경의 모습이다. 그 장면은 아마도 헬기에서 찍었겠지만, 그것은 해방된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해방된 이의 시선이다. 그 시선 속에서 그 압도적 경험은 비로소 사소한 제자리를 찾는다. 2000년에 만들어져 개봉한 ‘유레카’는 21세기를 여는 영화였다. 21세기의 4분의 1이 지난 지금 한국에서 재개봉했으나, 이 영화는 여전히 현재형으로 보인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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