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 감축 바람 분다…범선, 다시 돛을 펴라

이정호 기자 2026. 7. 5. 21:0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기업 벨라가 건조한 범선이 바다를 항해하고 있다. 선체 3개를 이은 ‘삼동선’ 형태다. 벨라 제공

프랑스 기업 ‘벨라’의 화물 범선
길이 67m에 안정감 큰 ‘삼동선’
최대 415t 싣고 시속 26㎞ 항해
탄소 배출량, 화석 연료의 10%
친환경 물류 지표 ‘스코프3’ 유리
내년 초부터 대서양 횡단 예정

1957년 8월10일, 대형 범선 ‘파미르호’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출항해 독일 함부르크로 떠나는 대서양 횡단 항해를 시작한다. 승조원 86명이 탄 이 배에는 보리가 3000t 넘게 실려 있었다.

순조로운 듯했던 파미르호의 항해는 출항한 지 한 달 남짓 지난 9월21일 재앙 속으로 빨려든다. 허리케인과 맞닥뜨린 것이다. 거센 폭풍에 휘말린 파미르호 선체에 바닷물이 다량 밀려들었고, 급기야 복원력이 상실됐다.

파미르호는 결국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구조된 승조원은 6명뿐이었다. 이 사고는 당시 독일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안 그래도 디젤 엔진을 장착한 선박에 밀려 고전하던 대서양 횡단 화물용 범선의 시대는 이 비극과 함께 막을 내렸다.

그런데 지난달 말, 지금까지도 대세 자리를 지키고 있던 ‘화석연료 선박 시대’에 도전장을 내민 배가 등장했다. 주인공은 최첨단 에너지 기술로 무장한 새로운 선박이 아니었다. 돌아온 범선이었다.

1949년 10월 대형 범선 파미르호가 영국 근해를 항해하고 있다. 파미르호는 1957년 허리케인을 만나 침몰했다. 호주 국립도서관 제공


바람으로 항해…탄소 감축 ‘특효약’

대서양을 횡단하는 범선 시대를 되살리겠다며 호기롭게 나선 것은 ‘벨라’라는 프랑스 해운사다. 벨라가 전문 조선사와 함께 내놓은 범선은 모양새가 독특하다. 삼동선(트리마란), 즉 선체가 3개인 배다. 길이 67m짜리 주 선체를 가운데에 놓고, 주 선체보다 수m 짧은 보조 선체를 좌우에 한 척씩 배치했다. 각 선체는 하나의 갑판으로 연결했다.

삼동선은 선체 균형을 잡기에 좋은 구조다. 양쪽 보조 선체가 지지대 역할을 해서다. 선체가 하나인 배보다 훨씬 안정감이 크다. 파도나 바람에도 배가 기우는 일을 최소화한다. 폭풍을 만나도 웬만해서는 가라앉지 않는다. 범선을 부활시키기는 했지만, 예전처럼 폭풍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구식 선체는 거부한 것이다.

지금도 대서양을 횡단할 수 있는 배는 얼마든지 있는데, 벨라가 굳이 범선을 만들려는 이유는 뭘까. 탄소를 감축하는 데 특효약이기 때문이다. 범선은 추진력을 만들기 위해 탄소를 배출하는 어떤 물질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돛을 부풀게 할 바람만 있으면 된다.

벨라는 공식 자료에서 “기존 컨테이너선보다 탄소 배출량을 90% 줄일 수 있다”고 밝혔다. 화석연료가 아니라 바람에서 동력을 얻기 때문에 실현 가능한, 선물 같은 수치다.

재생에너지 냉장 시스템 구비

하지만 벨라의 범선에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덩치가 너무 작다. 화물을 최대 415t 적재한다. 수천~수만t을 싣는 일이 예사인 일반적인 컨테이너선에 비해서는 턱없이 작다.

속도도 느리다. 벨라의 범선에는 갑판에 대형 돛대 2개가 설치돼 있다. 이를 통해 시속 26㎞로 항해한다. 이 정도 속도로 프랑스에서 미국 동부 해안까지 가려면 13일이 걸린다. 컨테이너선보다 대략 나흘이 더 걸린다. 적재량과 속도 모두 화석연료 엔진을 장착한 현재 컨테이너선에 열세다.

하지만 운송이 급박하지 않은 소량의 화물을 옮기는 주문에 특화해서 운영한다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것이 벨라의 판단이다. ‘스코프3’라는 환경 개념 때문이다. 최근 세계 기업이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관점에서 자사의 경쟁력을 대외적으로 알릴 때 쓰는 지표인 스코프3는 제품 생산은 물론 물류 과정 등에서 발생하는 총 탄소 배출량을 산출한다.

한마디로 만들어놓은 제품을 화석연료를 덜 쓰거나 안 쓰는 배로 운송할수록 스코프3에서 유리한 고지에 오른다. 기업 입장에서는 벨라의 범선이 확실한 대안인 셈이다.

벨라는 공식 자료를 통해 “선체 안에는 재생에너지로 돌아가는 냉장 시스템을 갖췄다”며 “품질에 민감한 제품도 운반할 수 있다”고 했다. 운송 가능 화물로는 의약품과 화장품, 주류 등을 예로 들었다.

벨라는 세계적인 물류기업 DHL과 화물 운송에 관한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었다고 밝혔다. 개발 단계를 넘어 상용화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벨라는 “상업 운항은 내년 초에 시작할 것”이라며 “궁극적으로는 주 1회 대서양 횡단 항해를 시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정호 기자 run@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