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프리즘’ 고구려 고분벽화… 정신세계·생활상·주변국 교류 담아

한겨레 2026. 7. 5.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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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로 보는 자본주의
고구려 중기 고분벽화를 대표하는 춤무덤(무용총)의 수렵도는 중국의 정형화된 도상인 말을 타고 뒤를 돌아보며 활을 당기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묘사된 명작이다. 한겨레 자료/ 권오영 제공

백제에 금동대향로, 신라에 금관이 있다면 고구려에는 고분벽화가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삼국시대 회화는 신라고분 천마총에서 발견된, 마구 위에 그려진 천마도가 있다. 이 외엔 백제에서 선물로 주었다고 전해지는 일본 호류사 소장 옥충주자의 네 면에 그려진 그림, 고구려의 담징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호류사의 금당 벽화가 화재로 전소한 뒤 복원된 것 정도다. 이처럼 당시의 회화를 만나기 어렵다보니 고구려 고분벽화는 현존하는 그 시대의 회화라는 사실만으로도 독보적 가치를 지닌다.

고분벽화는 장르적으로 보면 건축이면서 회화이고, 내용적으로는 사후를 대하는 종교적 세계와 더불어 현생에서의 삶의 모습을 함께 담고 있는 복합적 유적이다. 현재까지 고구려 고분벽화는 평양을 중심으로 남포·안악 일대에 80여 기, 그리고 지금은 중국 영토가 된 집안(지안) 일대에 30여 기 등 상당한 수가 남아 있다. 따라서 이 벽화들을 통해 당시의 건축과 종교 및 생활상을 엿볼 수 있고, 동시에 주변국과의 교류와 영향 관계, 고구려만의 독자적·문화적 성취를 추적할 수 있다.

돌방무덤 등장으로 벽화 가능

고구려의 무덤 양식은 원래 널(관) 위에 돌을 쌓아 덮은 돌무지무덤(적석총)이다. 그런데 벽화는 무덤 안에 벽이나 천장이 있어야 그릴 수 있기 때문에 석실을 짓고 흙으로 덮은 돌방무덤(석실묘)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가능하게 됐다.

중국 무덤의 경우에도 땅에 구덩이를 파서 널(관)을 안치할 수 있도록 덧널(목곽)을 만드는 간단한 구조에서 한(漢)대가 되면 벽돌이나 돌로 묘실을 만들고, 묘 안에 앞뒤의 방(전실과 후실)과 긴 연도를 만드는 등 복잡한 구조로 발달했다. 가장 이른 시기인 4세기 중반 무렵에 조성된 ‘안악 3호분’이 이처럼 여러 칸으로 된 돌방무덤이어서 한대에 발달한 무덤 양식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묘의 벽면이 많아지면서 그림도 많아져 안악 3호분 벽화에는 묘주의 초상화와 행렬도, 부엌과 우물, 동물의 도축 장면 같은 생활공간이 묘사돼 있다. 이 그림들 하나하나는 당시의 생활상을 알려줄 뿐 아니라 주변국과의 영향 관계를 함께 보여준다.

예를 들어 행렬도는 그 원형이라 할 만한 출행도를 176년에 조성된 한나라 고위 관리의 무덤인 ‘하북성(허베이성) 녹가장묘’의 벽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크로드 길목의 둔황 근처 주천(주취안)에 있는 위진남북조시대의 ‘정가갑 5호분’의 벽화에서는 묘주의 초상과 생전의 생활 모습 외에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과 시왕의 모습 등이 그려져 있다. 고분벽화의 전형이 이 일대에 공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중국 한대 고분벽화의 경우 대개 천장에는 천상계를, 천장과 닿은 벽면의 윗부분은 신선들이 사는 곳을 설정해 삼신산 등을 그렸다. 이처럼 천상계를 지상계와 구분해 그린 것은 기원전 2세기에 조성된 장사(창사)에 있는 한나라 관료의 묘 마왕퇴에서 나온 티(T)자형 비단 그림에서부터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5세기 초엽에 조성된 덕흥리 고분의 천장 사면에 별자리 및 신선신앙과 관련된 소재들, 그리고 4세기 말에 도입된 불교의 영향으로 연꽃 등이 등장한다. 이 초기 벽화들은 인물의 복식 등이 중원의 복식을 따르고 있고 그림 솜씨도 아직 서툴러 한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덕흥리 무덤 근처의 5세기 중후반에 조성된 수산리 무덤과 두기둥 무덤에서는 벽면에 목조건축의 구조를 명확히 나타내 실내임을 강조하고, 행렬도에 등장하는 여인의 복식이 고구려 복식을 따르는 등 고구려가 비로소 독자적 벽화 양식을 확립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주름치마를 입은 고구려 여인의 도상은 5세기 초 조성된 서안 인근의 ‘병령사 169굴’의 벽화에도 동일한 복식의 여인들이 등장하고,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로 추정되는 일본 나라현의 다카마쓰즈카 고분에도 등장한다. 당시 이들 국가 간의 긴밀한 교류, 혹은 고분벽화 양식의 영향 관계를 추정케 한다.

중기 고분벽화를 대표하는 씨름무덤(각저총)과 춤무덤(무용총)은 묘주의 초상이 한결 자연스럽고 동적으로 표현됐다. 특히 춤무덤에 그려진 수렵도는 중국의 정형화된 도상인 말을 타고 뒤를 돌아보며 활을 당기는 모습이 아주 생동감 있게 묘사된 명작으로 앞 시기보다 일취월장한 그림 솜씨를 보여준다. 씨름무덤의 씨름 그림은 씨름하는 인물이 서역인임을 바로 알 수 있도록 얼굴의 특징을 정확하게 포착해 당시 고구려가 서역인들과 활발히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6세기 중후반이 되면 고구려 고분벽화는 동서남북 네 벽에 사신도를 그려 넣는 것으로 정리됐다. 북한 남포 인근 강서대묘의 ‘현무도’. 연합뉴스

6세기 중후반이 되면 두 칸으로 돼 있던 석실은 단실로 간소화되면서 고구려 고분벽화는 완숙기를 맞는다. 호류사의 금당 벽화를 그렸다는 담징이 일본에 건너간 것이 610년경이니 이즈음 고구려의 회화적 역량은 이미 최고조로 성숙해 있었다. 그리고 많은 벽을 채웠던 다양한 그림들이 단실로 축소되면서 이 시기 벽화는 동서남북 네 벽에 사신도를 그려 넣는 것으로 정리됐다.

6세기 중후반부터 사신도로 정리

사신도는 기원전 200년 무렵인 한나라 때부터 중국에서 만들어 사용하던 상징으로 동서남북 네 방위와 사계를 수호하는 신령스러운 동물을 지칭한다. 동쪽과 봄을 지키는 청룡은 일반적 용의 모습이고, 서쪽과 가을을 지키는 백호는 호랑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상 용처럼 몸이 길고 날개가 달린 신화적 동물이다. 남쪽과 여름을 지키는 주작은 봉황의 형상이며, 북쪽과 겨울을 지키는 현무는 거북과 뱀이 한 몸으로 얽혀 있는 형상이다. 고구려는 이를 벽화에 부분적으로 사용하다가 마침내 사신도만으로 벽화무덤을 채우면서 사신도를 사후 세계를 지키는 도상체계로 구현했다.

게다가 대략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퉁구사신무덤이나 강서대묘의 사신도는 이를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데 절정의 경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고구려 문화의 우수성을 바로 이 사신도를 통해 느끼곤 한다. 그러나 고구려 고분벽화는 단순한 회화적 성취를 넘어 당시의 무덤 양식과 정신세계 및 생활상, 그리고 주변국들과의 교류 및 문화적 영향 등 다양한 정보를 보여주는 일종의 프리즘이다.

이승현 미술사학자 shl219@hanmail.net

이승현은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증권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7년을 다니다 작은 금융자문회사를 차렸다. ‘선진’ 금융을 보급한다고 했으나 그 환상이 깨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 혼자 영국 런던의 내셔널갤러리와 호텔에서 2주가량 지낼 정도로 미술에 미쳐 미술사학과 대학원에 입학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다양한 전시를 기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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