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피란선에서 태어난 기적 같은 ‘김치 베이비’… 자유의 첫울음이었다

조유미 기자 2026. 7. 4.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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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조유미 기자의 깨발랄]
6·25전쟁 흥남 철수 작전 중
수송선서 태어난 손양영·이경필
지난달 26일 경남 거제시 ‘흥남철수기념공원’에서 만난 ‘김치 1호’ 손양영(왼쪽) 이북5도위원회 함경남도지사와 ‘김치 5호’ 이경필 장승포가축병원장. 사진 속 조형물은 1만4000여 명의 피란민을 태운 흥남 철수 작전의 마지막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 뱃머리를 본뜬 것이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23일, 흥남 철수 작전의 마지막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이하 빅토리호)’가 함경남도 흥남항을 떠나 남쪽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군수 물자를 나르던 7600t급 화물선으로 고작 60명 남짓 탑승하도록 설계된 이 배에 1만4000여 명의 피란민이 몸을 실었다. 미군은 부두를 가득 메운 피란민을 그대로 둘 수 없어 군수 물자를 모두 버리고 피란민을 태웠다. 하지만 언제 중공군의 공습이나 추격이 시작될지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 속에 그 누구도 이남 땅에 무사히 닿으리라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최종 행선지인 경남 거제에 도착하기 전 배 안에서 뜻밖에 다섯 아이가 첫울음을 터트렸다. 12월 25일 성탄절이었다. 전쟁 한복판에서 같은 날 피어난 다섯 생명은 피란민에게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살아 있다’는 증표와 같았다. 미군들은 이를 두고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했다. 신생아들을 태어난 순서대로 ‘김치 1~5호’라고 불렀다. 김치가 미군들에게 친숙한 단어였던 데다 ‘강인한 성격의 한국인을 닮은 음식’이라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김치 베이비’의 축복 덕분일까. 흥남항을 출발해 거제 장승포항에 닻을 내리기까지 사흘간 배에 탄 피란민은 한 사람의 사망자도 없이 전원 생존했다. 빅토리호는 단일 선박으로는 가장 큰 규모의 구조 작전을 수행해 2004년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2014년 개봉한 영화 ‘국제시장’에도 등장했다.

그로부터 76년이 흘렀다. 여전히 그날의 생명력을 증명하고 있는 두 명의 ‘김치’를 지난달 26일 거제시 옛 장승포항 여객선 터미널에 조성된 ‘흥남철수기념공원’ 개관식에서 만났다. ‘김치 1호’ 손양영(76·이북5도위원회 함경남도지사)씨와 ‘김치 5호’ 이경필(76·장승포가축병원장)씨다. 두 사람은 “빅토리호 선원과 미군, 낯선 거제 땅이 내어준 온정은 평생 갚아야 할 빚”이라고 했다.

군수 물자를 나르던 7600t급 화물선이던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1만4000여 명의 피란민이 몸을 실었다. 이 배는 단일 선박으로는 가장 큰 규모의 구조 작전을 수행해 2004년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거제시

-흥남철수기념공원이 생겼어요.

이 : “오랫동안 바라던 일이었습니다. 이곳은 단순한 기념공원이 아니라 안보 공원이자 평화 공원입니다. 흥남 철수는 인간의 생명을 끝까지 지켜낸 인도주의 작전입니다. 젊은 세대가 그 의미를 되새기고 역사를 배우는 공간이 됐으면 합니다.”

-철수선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사실이 삶에 어떤 의미였습니까.

손 : “우리는 수많은 사람의 희생과 도움으로 살아남았어요. 어머니가 저를 낳자 피란민들은 비좁은 배 안에서 몸을 녹이라며 너나없이 담요를 덮어줬다고 합니다. 거제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빈방을 내어주고 밭에 움막을 지어주고 주먹밥도 가져다 줬답니다. 은혜를 잊지 않고 전쟁의 참혹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전하는 것이 제 삶의 책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배에 타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이 : “저도 궁금해서…. (침묵) 탈북민에게 흥남 철수 이후 북한에 남은 사람이 어떻게 됐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모두 죽였다고 합디다. 부모님은 물론 저희도 무사하지 못했을 거예요.”

‘김치 5호’ 이경필(왼쪽)씨와 ‘김치 1호’ 손양영씨가 경남 거제시 흥남철수기념공원에 조성된 기념관 안에 서 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김치 1호' 손양영(왼쪽)씨는 "죽기 전 북한에 있는 형과 누나를 만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김치 5호' 이경필(오른쪽)씨는 "우리 스스로 나라를 지킬 힘이 있어야 다른 나라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며 '자주국방'을 강조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장진호 전투 덕에 가능했던 철수

흥남 철수 작전은 1950년 12월 15일 시작됐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흥남에서 미군 10군단과 대한민국 육군 1군단 10만여 명, 피란민 10만여 명이 철수한 작전이다. 두 사람은 부모님에게 6·25전쟁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다. 그중에서도 마음 깊이 새겨진 이야기는 흥남 철수의 도화선이 된 ‘장진호 전투’다. 1950년 11~12월 미 해병 1사단 등 유엔군 3만명이 함경남도 장진호 인근에서 중공군 12만명의 포위망을 뚫고 흥남까지 철수한 전투다. 영하 40도 안팎의 혹한 속에 치러져 ‘미군 역사상 가장 참혹한 극한지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부모님께서 어떤 이야기를 하셨나요.

이 : “흥남 철수는 장진호 전투에서 유엔군이 희생하며 중공군 남하를 지연시킨 덕분에 가능했다고요. 그 희생이 없었다면 흥남 철수도, 저희도 없었을 겁니다. 생명의 은인인 유엔군 장병의 희생을 결코 잊어서는 안 돼요.”

-두 분께 한미동맹의 의미가 남다르겠습니다.

손 : “우리는 한미동맹의 결실입니다. 철수 당시 흥남 부둣가는 기뢰밭이었대요. 언제 배가 폭발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미군이 피란민을 태운 겁니다. 한미동맹이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건 이런 인도적인 마음과 젊은 아들들을 전쟁터로 보내준 미국 국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방의 작은 나라’를 위해서요. 신뢰와 상호 존중의 마음이 있는 한 한미동맹은 앞으로도 계속될 겁니다.”

-장진호 전투 참전용사를 만난 적 있다고요.

이 : “한미동맹 60주년 때 미 10군단 부참모장으로 흥남 철수 작전을 지원했던 에드워드 포니 대령 가족과 미 재향군인회에 감사패를 전달했었습니다. 당시 포니 대령은 피란민 철수를 적극 주장했던 인물이지요. 전달식에서 만난 장진호 전투 용사가 저를 붙들고 소리 내 울었습니다. 전투 때 전우들이 많이 동사했다고…. 저는 미군 덕분에 살아 있어요. 미군을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하는 저 같은 사람이 대한민국에 많이 있습니다.”

-부모님 선택 덕에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크게 실감한 순간은.

이 : “예전에는 언젠가 고향에 돌아갈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북에 다녀온 분들에게 들으니 산은 헐벗고 주민들이 ‘1달러만 달라. 그 돈이면 한 달을 먹고산다’고 했다더군요. 남쪽은 북에 분유를 보내고 모내기를 도울 만큼 달라졌어요. 남으로 온 선택이 어떤 의미였는지 그때 절실히 느꼈습니다.”

경남 거제시 흥남철수기념공원 기념관 내에 전시된 '김치 1호' 손양영씨의 어린 시절 모습과 가족 사진.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아버지는 북향으로 묘를 썼다

‘김치 1호’ 손양영씨 가족은 함경남도 북청 출신이다. 급박했던 피란 당일, 만삭인 손씨 어머니에게 새벽부터 진통이 오기 시작해 손씨 가족은 피란을 포기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인들이 ‘공산 세력이 득세하면 신변을 보장받기 어렵다’며 손씨 부모를 설득했다. 당시 건설업에 종사하던 손씨 아버지는 함흥시청·흥남시청 등을 오가며 근무했던 공무원 이력이 있었다.

손씨 부모는 ‘곧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당시 아홉 살이던 아들, 다섯 살 난 딸을 “잠시만 보살펴 달라”며 형제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홑옷만 걸친 채 급하게 빅토리호에 탑승했다. 2~3주만 떨어져 있으면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두 자식과 그렇게 이별했다.

-‘1호’ 김치입니다.

“어머니가 배에 탄 뒤로 너무 긴장을 해서 진통마저 잊었답니다. 그러다 부산항에 도착했다고 하니(빅토리호는 12월 24일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부산항은 수많은 피란민과 군수 물자로 포화 상태여서 부상자와 일부 인원만 내리고 다시 거제로 향했다) 긴장이 풀려 갑자기 아이가 나온 거죠. 저는 선장실 옆 의무 부속실에서 태어났고, 뒤이어 화물칸에서 다른 ‘김치’들이 태어났어요. 산모들이 모두 같은 마음이라 연달아 아이가 나온 게 아닌가(웃음).”

거제에 도착한 손씨 아버지는 미군 PX에서 일하다 손씨가 일곱 살 때 가족을 데리고 부산으로 이사했다. 손씨 아버지는 서면의 한 한의원에서 약재 써는 일을 도우며 생계를 꾸렸다. 어느 날 손씨에게 아버지는 말했다. “서울에 살아야 38선이 무너졌을 때 빨리 고향을 찾아갈 수 있다. 너희 형이랑 누나 찾아야지.” 손씨가 열 살 되던 해였다.

-희망을 놓지 않으셨군요.

“그렇게 서울로 이사했어요. 아버지는 고향에 가려면 돈을 벌어야 된다며 낮에 닥치는 대로 잡일을 받아 하고, 밤에는 한의원을 차리기 위해 한의학을 공부했습니다. 코피를 여러 번 흘리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시던 모습이 기억나요.”

손씨는 연세대에 입학해 금속공학을 전공하고 경영대학원에 들어가 경제를 공부했다. 1970년대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 말에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무역사 시험에 합격하고 정부 지정 종합 무역 상사에 입사해 철강 수출을 담당했다. “포항제철이 막 가동을 시작할 무렵”이라고 했다. 해외 주재원으로 정신없이 살았다. 1981년엔 1000만달러 계약을 따내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다. 이후 철강 무역 회사를 운영했고 2023년 이북5도위원회 함경남도지사로 선임됐다.

-부모님이 고향을 많이 그리워하셨다고요.

“어머니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매일 아침 물 한 그릇을 떠놓고 북녘을 향해 기도했어요. 두고 온 자식의 무탈을 위해서요. 치매가 온 뒤로는 제 아내를 보고 누나 이름을 부르더군요. 아버지는 ‘생전에 만나지 못한 가족을 저세상에서라도 바라보고 싶다’며 북녘 땅이 보이는 산자락을 사서 묫자리를 잡으셨어요. 물론 남향이 아닌 북향이었죠. 부모님을 그곳에 모셨습니다.”

-소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죽기 전 형과 누나를 만나고 싶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남긴 말씀이 있어요. 형과 누나에게 ‘너희를 버린 게 아니다’는 말을 꼭 전해 달라고 했어요. 이 말을 전하지 못하고 눈을 감으면 죽어서도 한이 될 거 같아요.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 덕수가 흥남에서 잃어버린 여동생과 극적으로 만나잖아요. 그 장면이 너무도 부럽습니다.”

경남 거제시 흥남철수기념공원 기념관 내에 전시된 '김치 5호' 이경필씨의 어린 시절과 가족 사진.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그저 평화·평화·평화…

‘김치 5호’ 이경필씨 아버지는 만삭인 아내와 세 살배기 큰아들 손을 잡고 피란길에 올랐다. 당시 3대 독자였던 이씨 아버지에게 노모(老母)는 “난 집을 지키고 있겠다. 일주일이면 전쟁이 끝날 테니 다시 돌아오라”고 했다. 이씨는 빅토리호가 장승포항에 막 도착했을 무렵, ‘김치 베이비’ 중 마지막으로 태어났다. “당시 산파가 탯줄을 이로 끊어내고 치마저고리를 찢어 절 닦아줬다고 합니다. 감사할 뿐이지요. 지금도 산파의 딸이 1년에 한 번씩은 저를 찾아와요.”

-피란민이라 어려움이 많았다고요.

“가족이 이북에서 왔다는 사실을 국민학교 입학해서 알았어요. 주변에서 ‘피란, 피란’ 하며 놀리더군요. 어린 마음에 왜 피란을 왔느냐고 부모님께 물으니 ‘너희 살리려고 왔다’ 하셨습니다.”

-그렇죠, 살리려고….

“거기는 겨울이면 기온이 영하 20~30도는 우습게 내려간다고 했어요. 당시 소련군이 여성들을 괴롭히며 겁탈하기도 했고요. 반면 미군은 도로를 깔아주고 초콜릿과 우유를 나눠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족을 살리기 위해 남으로 오셨다고요.”

이씨 아버지는 북한에서 ‘백두사진관’을 운영하던 사진사였다. 피란길에 카메라 두 대를 챙겨 와 거제에 ‘평화사진관’을 열었다. 얼마 뒤에는 거제 포로수용소 경비로 징용됐다. 이씨 아버지는 포로들이 입던 옷 등을 모아 아내에게 전했고, 아내는 이 옷을 수선해 부산 국제시장과 깡통시장 등에 내다 팔았다. 억척스럽게 모은 돈으로 거제에 상회를 열었다. 이름이 ‘평화상회’였다.

-‘평화’가 붙었네요.

“형이 연 식당 이름은 ‘평화식당’, 제가 운영하는 가축 병원 이름도 1975년 문을 열 당시에는 ‘평화가축병원’이었어요. ‘전쟁의 참상을 잊지 말라’는 의미로 아버지가 붙이신 이름입니다. 제가 병원 이름을 바꾸려고 하니 ‘나 죽으면 바꾸라’고 하시더군요.”

-어떻게 수의사가 된 건가요?

“부모님이 3000평가량의 양계장도 운영하셨는데 제가 고등학생 때 태풍으로 닭 7000마리를 잃었어요. 수의사가 중요한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수의학과에 진학했죠.” 그는 ROTC 11기로 강원도 철원에서 복무했다. “군에 가야 통일되면 고향에 먼저 갈 수 있다”는 아버지 권유 때문이었다. 이씨 큰아들도 할아버지 영향으로 공군이 됐다.

-복무를 마치고 거제로 돌아왔어요.

“원래 가축이 많은 충남 서산에 자리를 잡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거제로 돌아와 가족을 품어준 이웃에게 은혜를 갚으라’고 하시더군요.” 이씨는 “아버지는 늘 고향을 그리워했지만,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하지도 못했다”고 했다. 고향에 남은 할머니와 이모·이모부에게 혹시라도 피해가 갈까 걱정해서였다.

-명함에 평화·은혜·나눔 문구를 적어놨는데.

“다시는 6·25전쟁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리고 우리 가족을 살려준 미군의 희생과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다짐입니다. 이 고마움을 나눔으로 돌려주며 살고 싶어요.”

◇참상을 잊지 않아야 하는 이유

두 사람은 자신들이 태어났을 때 ‘김치’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걸 2006년 무렵에서야 알았다고 한다. 그즈음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가 출범하고 관련 다큐멘터리가 제작되면서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됐다. ‘김치’라는 이름은 빅토리호의 일등항해사였던 고(故) 로버트 러니 미 해군 제독이 지었다.

-그때 처음 만난 건가요?

손 : “어머니께 같은 날 태어난 아이가 있었다고는 들었는데 모두 다섯 명인 줄 몰랐어요. 근데 그때 같이 태어난 ‘이경필’이라는 사람이 날 찾는다고, 아직 거제에 산대요. 처음에는 덤덤하다가 나중에 눈물이…. 나랑 같은 운명이니 반갑고 너무 떨리는데 표현을 못 하겠고.”

이 : “나보다 몇 시간 빨리 나왔으니 ‘행님’이라고 했어요, 처음에는(웃음). 지금은 자주 만나서 격의가 없어졌어요.”

나머지 3명의 행방은 확인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기회가 될 때마다 함께하며 6·25전쟁의 참상과 평화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 북한 선수단과 외교 사절단이 참가했던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자원봉사도 했다. 지난해에는 빅토리호의 마지막 생존 승선원인 벌리 스미스(97)씨를 거제에서 다시 만나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이씨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안보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한 강연을 한다. 지금까지 이씨 강의를 들은 사람 수만 9만7000명이 넘는다고 했다. 그가 무엇보다 강조하는 건 ‘자주국방’. 우리 스스로 나라를 지킬 힘이 있어야 다른 나라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흥남 철수나 6·25전쟁을 교과서에서만 배우잖아요. 그래서인지 제 이야기를 들으면 깜짝 놀라요. 저는 부모님께 들은 이야기와 제 삶을 통해 전쟁이 한 사람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는지 들려줍니다. 다시는 그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요. 수많은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걸 젊은 친구들이 기억했으면 합니다.”

손씨에게 전쟁이 삶에 남긴 흔적이 무엇인지 물었다. 이런 답이 돌아왔다. “전쟁은 평화의 가치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전쟁은 사랑하는 가족과 평화롭게 살아갈 권리, 흩어진 가족이 다시 만날 권리까지 빼앗아가요. 인간의 존엄과 삶의 가치는 평화가 있을 때 비로소 지켜집니다. 우리가 전쟁의 참상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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