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렸어, 야르~" 털어내는 실험실… 아이들 마음에 '과학' 심는다
의대·치대 가는 과학·영재고 학생 연간 '100명'
과학고 교장이 만든 디지스트 영재교실 가보니
선행 학습 대신 실험 중심...'과학자 정신' 키워
"성과 집착보다 과학 자체의 재미 느낄 수 있게"
편집자주
'짝퉁'과 '탈취'만으로 중국의 첨단기술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중국은 인공지능(AI)·로봇 등 여러 분야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중국 혁신의 현장을 들여다보고 한국이 무엇을 경계하고 무엇을 배워야 할지 짚어봤습니다.

4월 15일 밤 9시, 불이 꺼진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디지스트) 생물동. 전자현미경과 각종 시약이 빽빽하게 놓인 실험실에서 재잘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작은 체구에 맞춘 실험복에 안전 장갑과 보안경까지 꼼꼼하게 갖춰 입은 아이들이 보였다.
이곳에선 클로렐라(미세조류) 볼에 광원을 쬐고 광합성을 유도해 우주식량을 만들어보는 실험이 한참이었다. 중학교 2학년인 최예지, 박성아, 심예은양은 밀봉해 뒀던 상자를 조심조심 열었다. 세 아이가 머리를 맞대고 숨을 죽인 것도 잠시. "앗, 망했다!" 예지양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광합성으로 산소가 만들어졌다면 조류 볼을 넣어둔 시약이 보라색이 됐어야 했지만, 1시간 전과 다름없이 주황색이었다. 눈을 흘기던 성아, 예은양도 휴대폰으로 '망한 실험' 결과를 촬영하며 키득댔다. 그러다 다른 팀에서 "우와 색깔이 변했다!"는 탄성이 터져 나오자 세 아이도 우르르 뛰어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비법이 무엇입니까" "우리도 (조류 볼을) 더 많이 넣었어야 했나?" 실험 결과와 상관없이 실험실에 모인 아이들은 모두 웃는 얼굴로 '배우고' 있었다.
한국 과학계를 관통하는 가장 큰 걱정은 인재난이다. 어릴 적 발굴해 어렵게 키워낸 과학 인재들이 의대에 진학하거나 해외로 빠져나가고, 외국에서 공부한 실력 있는 인력은 귀국하지 않는다. 과학 인재들을 잡아두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일보가 입시 위주 교육 속에서 변질된 과학의 본질적 가치를 되찾고, 진짜 과학 영재를 키워내기 위해 새로운 실험에 나선 디지스트 과학창의학교를 찾은 이유다.
어느 과학고 교장의 도전
과학창의학교는 지난해 처음 문을 열었다. 2019년부터 4년간 대구과학고 교장을 지낸 석창원 디지스트 융합인재원장이 설립을 주도했다. 교장 재임 기간 내내 석 원장을 괴롭게 했던 고민이 설립 계기가 됐다. "과학고는 과학기술 분야 우수 인재 양성을 목표로 만들었는데, 아이들이 자꾸 메디컬(의대)로 빠져 나가는 겁니다. 이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재학생과 학부모들은 연구·탐구활동보다 내신 성적 관리에 집중했고, 과학에 애정을 갖기보다는 의대 진학을 위한 '스펙' 목적으로 입학하는 학생이 많아졌다.
당시 전국과학·영재고협의회장을 맡았던 석 원장은 특단의 대책을 세웠다. 지원자와 부모의 서명을 받은 '이공계 진학 확약서' 제출을 의무화했고, 의대·치대·수의대·한의대·약대에 진학하면 생활기록부에 교육 과정에서 얻은 성과를 말소하도록 했다. 교육비와 장학금까지 환수해 '과학자 누수'를 막아보려 했다.

그럼에도 소용없었다. 학생들은 불이익을 감수하고 의대 진학을 멈추지 않았고, 과학·공학 계열에 진학하더라도 의대 진학을 위해 '반수'를 했다. 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입수한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의대·치대 등 메디컬 계열에 진학한 영재학교·과학고 출신 학생은 △2024년 202명 △2025년 179명 △2026년 111명이었다. 석 원장이 그토록 막아보려 했지만, 매년 100명 이상의 과학인재가 의대로 향하고 있었다.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게 석 원장이 내린 결론이었다. "무작정 의대를 못 가게 막을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과학을 택하도록 하면 되잖아요. 교과서 달달 외우고 문제만 풀게 하면 아이들은 모릅니다. 과학이 얼마나 재밌는 건지요."
과학, 함께 고민하는 재미

과학창의학교의 목표는 단순하다. 첫째, 학교에서 해보지 못한 실험을 직접 설계하고 체험할 수 있게 한다. 둘째, 마음껏 상상하고 도전하고 실패하면서 배우는 '연구' 경험을 통해 과학을 재밌다고 느끼게 한다. 디지스트 교수진과 영재고 출신 교원 10여 명은 한 학기 동안 6개 반의 지도를 맡았다.
과학창의학교의 가장 큰 특징은 선행 학습이 목표가 아니라는 점이다. 최예지양이 참여한 우주식량 배양 실험 역시 중학교 2학년 과학 교육과정에 포함된 광합성 단원의 연장선이었다. 지도를 맡은 김윤희 교사는 "학교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실험을 정규 교과 내용과 어긋남 없이 연결했다. 교사는 큰 틀만 설명하고 세세한 변수는 아이들이 고민해서 정할 수 있게 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실험 설계의 주도권은 온전히 학생들에게 주어졌다. 학생들은 튜브 안에 투입할 조류 볼의 개수부터 전등 앞 배치 방식, 쬐어볼 빛의 색까지 모든 조건을 스스로 결정한다. 예지양이 속한 팀은 성공을 기원하는 의미로 7개의 조류 볼을 넣었다.
실험 조건에 대해 마음껏 의견을 나누는 자유로운 분위기는 아이들에겐 자연스러운 교육의 장이 됐다. 옆 팀으로 옮겨간 예지양이 "몇 개 넣을 거야?"라고 묻자 "10개"라는 답이 돌아왔다. 예지양은 곧바로 "(이전보다) 많이 넣었으니, 나중에 시약 색을 비교해 보면 되겠다"라며 돌아섰다.
교사의 강요 없이 학생들 스스로 대조군을 설정하고 변수를 통제하는 정밀한 실험 과정이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아이들은 팀별 경쟁을 넘어 서로의 결과를 공유하고 탐구하는 '실험실 정신'을 스스로 학습하고 있었다.
"오답은 정답으로 향하는 길"

실패와 시행착오를 대하는 태도도 달랐다. 같은 날 화학동 실험실에선 서로 다른 용액에 레이저를 통과시켜 빛의 퍼짐 정도를 관찰하고 입자 크기를 비교하는 실험이 진행 중이었다. ①염화철이 섞인 증류수 ②가열한 염화철 ③알루미늄과 염화철이 녹은 물 등 중학교에서 접하기 어려운 화학 용액을 활용했다. 학생들은 스스로 가설을 세우고 끊임없이 관찰해야 했다. 까다로운 실험 조건 탓에 여기저기서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중학교 2학년 박해명군 역시 마지막까지 고개를 갸웃하며 일지와 비커를 번갈아가며 들여다봤다. 그러나 실험이 아무리 길어져도 그 누구도 해명군을 재촉하지 않았다. 곁에서 지켜보던 임나율양이 입을 열었다. "학교에선 보통 필기시험을 통해 개념을 이해했는지 확인하잖아요. 하지만 여기선 우리가 직접 실험을 설계하고 수행하면서 스스로 깨닫는 점이 학교와는 달라요."

이날 실험실에서 가장 많이 들렸던 말은 '야르'. 요즘 10대 사이에서 유행하는 감탄사로, 기분이 좋거나 신날 때 주로 외친다. 눈에 띄는 건 미리 세워둔 가설대로 실험이 풀리지 않던 학생마저 툭툭 자리를 정리하곤 "야르" 외마디를 내뱉는다는 점이었다.
가설이 '틀린' 걸 알게 되면 주눅 들거나 속상하지 않을까. 해명군과 나율양은 태연한 표정으로 "괜찮다"며 웃었다. "수많은 가능성 중 맞지 않는 데이터 하나를 지워나간 것뿐이잖아요." "그냥 다음 실험으로 넘어가면 돼요. 오답 역시 정답에 가까워지는 과정이니까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학생들의 모습에선 어엿한 과학자의 기질이 보였다.
석 원장이 꿈꿨던 영재교육은 이런 것이었다. "실험을 하다 보면 이론대로 나오는 일이 드물어요. 중요한 건 현상의 원인을 찾는 과정이고, 그것을 우린 과학이라고 부릅니다. 아이들이 이 과정을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도록 교실 문을 쭉 열어둘 겁니다."
2026 차이나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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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1> 중국 과학굴기 해부: 인재 도둑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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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2> 중국 과학굴기 해부: 우리가 외면한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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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3> 중국 과학굴기 해부: 중국의 실리콘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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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4> 중국 과학굴기 해부: 마피아와 카피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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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5> 중국 과학굴기 해부: 기술 포비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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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6> 중국 과학굴기 해부: 공산당의 뚝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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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7> 중국 과학굴기 해부: 어두운 한국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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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한국일보 '차이나 리포트'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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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8> 중국 과학굴기 해부: 활기찬 중국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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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9> 중국 과학굴기 해부: 실패할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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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 <10> 중국 과학굴기 해부: 더 나은 실패로
대구= 이유진 기자 iyz@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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