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이 완성하는 버추얼 아이돌의 시대[임지현의 콘텐츠&플랫폼 단상]

임지현 서강지속가능경영혁신연구소 센터장 2026. 7. 2.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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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을 보려고 들어간 플랫폼에서 버추얼 아이돌을 만나는 시대가 됐다. 지난 6월, 월드컵 조별리그 한국전이 열리던 날 아침 네이버 치지직에는 조금 낯선 생방송이 편성됐다. 킥오프를 앞둔 시간, 버추얼 아이돌 그룹 플레이브(PLAVE)의 월드컵 특집 라이브가 열린 것이다. 버추얼 아이돌이 더 이상 일부 팬의 취향이나 서브컬처 실험에 머물지 않고, 플랫폼이 적극적으로 초대하는 핵심 콘텐츠가 되었다는 신호였다.

임지현 서강지속가능경영혁신연구소 센터장

플레이브는 2023년 데뷔한 5인조 버추얼 아이돌이다. 이들은 디지털 아바타로 활동하지만, 노래하고 춤추는 것은 물론 작사, 작곡, 프로듀싱, 안무 창작에도 직접 참여하는 ‘자체 제작형’ 아이돌에 가깝다. 성과도 이미 기존 아이돌산업의 주요 지표로 설명될 만큼 커졌다. 데뷔 494일 만에 멜론 누적 스트리밍 10억 회를 넘겼고, 최근 발매한 미니 4집은 초동 판매량 125만 장을 돌파했다. 오는 9월에는 인천 공연을 시작으로 첫 월드투어에 나선다. 이제 플레이브는 “가상인데도 인기 있는 팀”이 아니라, “가상이기 때문에 새로운 방식으로성장한 팀”에 가깝다.

그런데 이 성공의 이유를 캐릭터 디자인이나 세계관의 완성도에서만 찾으면 절반만 보는 셈이다. 아무리 정교한 서사도 그것을 지켜주는 사람이 없으면 오래 버티지 못한다. 플레이브의 진짜 경쟁력은 그 서사 뒤편에 있는 팬덤의 참여 방식에 있다. 플레이브의 팬덤 ‘플리(PLLI)’는 단순히 콘텐츠를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플레이브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그 세계관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함께 행동한다.

플레이브는 모션캡처 기술을 통해 실제 사람의 움직임을 아바타에 실시간으로 입히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팬들도 캐릭터 뒤에 실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플리는 그 정체를 캐묻지 않는 것을 일종의 팬덤 규범으로 지켜왔다.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니다. 알지만 묻지 않는 것이다. 이 침묵은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세계관을 유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참여 행위다.

바로 이 지점에서 플레이브가 다른 콘텐츠와 구별된다. 보통 콘텐츠 산업에서는 제작사가 세계관을 만들고, 팬은 그것을 소비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플레이브의 구조는 다르다. 제작사는 캐릭터와 서사를 제공하고, 팬덤은 그 세계관이 깨지지 않도록 함께 관리한다. 팬은 더 이상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다. 세계관의 공동 관리자이자, 브랜드 신뢰를 유지하는 협력자다. 기업과 이용자가 각자의 몫을 나눠 맡아 하나의 가치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을 ‘코크리에이션(Cocreation)’, 우리말로 ‘협력적 가치창출’이라 부르는데, 플레이브는 이 개념이 팬덤 문화 안에서 실제로 작동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 신뢰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플레이브의 소속사 블래스트는 처음부터 대형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아니었다. VFX와 실시간 콘텐츠 제작 기술을 기반으로 출발한 기술 중심 회사였다. 데뷔 초기에는 기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관문을 통과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형식 자체가 낯설었고, 시장의 확신도 크지 않았다.

그럼에도 블래스트는 멤버들의 음악적 역량을 전면에 세웠고, 라이브 소통을 지속했으며, 팬들이 세계관 안에서 자연스럽게 역할을 가지도록 했다. 팬들에게 “이 선을 넘지 말라”고만 요구하는 대신, “이 세계를 함께 지켜달라”는 역할을 부여한 것이다. 그 차이가 팬덤의 충성도를 만들었다.

플레이브 이후 국내 버추얼 아이돌 시장은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어비스컴퍼니의 미완소년, 두나무 계열 레벨스의 비더후드 등 후발 주자들도 세계관과 캐릭터 서사를 앞세워 등장하고 있다. 기술은 더 정교해지고, 플랫폼은 더 다 양해지고, 팬덤은 국경을 넘어 이동하고 있다. 버추얼 아이돌은 이제 실험적 장르가 아니라 하나의 산업군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다만 후발 주자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세계관은 회사가 일방적으로 선포한다고 완성되지 않는다. 캐릭터 설정을 촘촘히 만들고, 그래픽을 화려하게 구현하고, 굿즈와 팝업스토어를 빠르게 붙인다고 팬덤이 자동으로 생기는 것도 아니다. 팬이 그 세계를 믿고, 더 나아가 지키고 싶어질 만큼의 신뢰를 먼저 쌓아야 한다.

캐릭터, 웹툰, 게임, K팝, 버추얼 아이돌이 하나의 IP 생태계로 연결되는 시대다. 콘텐츠 하나가 성공하면 곧바로 굿즈, 공연, 팝업스토어, 게임, 플랫폼 서비스로 확장된다. 그러나 IP 확장의 출발점은 기술의 완성도만이 아니다. 팬을 소비자로만 둘 것인가, 아니면 세계관을 함께 키우는 참여자로 볼 것인가의 문제다. 버추얼 아이돌의 시대는 기술이 열었지만, 그 시대를 완성하는 것은 결국 팬덤이다.

<임지현 서강지속가능경영혁신연구소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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