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기암 삼형제 어머니 떠나던 날, 혼주 한복 꺼내 입힌 그 간호사[人터뷰]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한국일보 '人터뷰'는 의미 있는 일을 하거나 사연이 깊은 인사를 만나 우리가 몰랐던 잔잔한 휴먼 스토리를 전달합니다.
"막상 출근해보니, 환자들이 너무 좋았어요. 출근하고 첫 일주일 동안 제가 살면서 받을 모든 감사를 그분들께 다 받은 거 같았거든요. 신이 났죠." 저절로 용감해졌다.
"암 병동에선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삶을 마감하는 이들만 봐왔는데, 여기선 환자들이 편안한 표정으로 가시는 거예요. 이렇게 다를 수가 있구나. 대부분 '여기가 이런 곳일 줄 알았으면 더 빨리 올걸' 그런 얘기들을 하시더라고요. 다들 임종이 너무 임박한 상태에서 오다 보니, 삶을 충분히 정리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신 거겠죠."
"유방암 환자였는데, 림프부종이 엄청 심했어요. 손이랑 팔이 부풀어올라서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거예요. 저도 처음 보는 증상이었죠. 너무 고통스러워하시니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팔을 수시로 힘껏 주물러줬어요. 당시만 해도 '마사지'라 하면, 손끝에 힘을 꽉 주고 하는 지압이 대부분이었거든요.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그분의 아들이 '나도 같이 해도 되냐'고 묻더라고요. 매일 둘이 환자의 양 팔을 하나씩 맡아 같이 열심히 주물렀죠."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편집자주
한국일보 '人터뷰'는 의미 있는 일을 하거나 사연이 깊은 인사를 만나 우리가 몰랐던 잔잔한 휴먼 스토리를 전달합니다.

어느 말기 암 환자가 눈을 감는다. 그의 마지막 시절을 돌봤던 간호사는 환자복을 벗기고, 옷을 갈아입힌다. 생전 고인이 가장 눈부셨던 순간에 걸쳤던 옷이다.삼형제의 어머니는 장남의 결혼식 날 딱 한 번 입었던 비단 한복을, 학교를 1년도 채 다니지 못한 열일곱 소년은 새 옷처럼 빳빳한 고등학교 교복을 입는다.
오직 이날을 위해 특별히 준비된 옷도 있다. 병동에서 자란 다섯 살 꼬마는 가장 좋아하는 색깔인 분홍색 원피스로, 소아암 환아로 태어났던 11개월 아기는 병원에서 미리 치른 돌잔치 때 맞춘 저고리로 몸을 단장했다. 이것은 환자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 돌아가는 의식이다. 짧았던 생 가운데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 속 자신으로 말이다.
이런 ‘환복 의식’을 만든 건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의 팀장 간호사 박명희(56)씨다. 그는 31년째, 이곳에서 약 만 명에 달하는 말기 암환자의 임종을 지켜온 국내 호스피스 역사의 산증인이다. “남겨질 가족들은 평생 마지막으로 본 환자의 모습을 기억할 거거든요. 수의를 입히기 전에 그저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왜 이런 의식을 자처할까. 떠난 자를 정성껏 배웅하고, 남겨지는 이들의 상실까지 보듬어 살피는 것이 호스피스 의료인의 몫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은 묻는다. ‘호스피스는 죽으러 들어가는 곳이 아니냐’고. 실상은 오히려 반대다. 박씨는 이곳이 ‘환자가 아닌 인간으로 살기 위해 오는 곳’이라고 말한다.
“병과의 싸움이 끝났으니, 비로소 삶이 다시 시작되는 겁니다. 이곳에선 먹고 싶은 음식을 망설이지 않고 먹어요. 저희 간호사들과 자원봉사자들이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구해다 드리죠. 살면서 소중한 이들에게 제때 건네지 못했던 말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 고맙다는 말, 미안했다는 말을 주저하지 않고 내뱉어요.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눈 감는 순간 후회가 될 테니까. 완전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이지요.”
"손쓸 수 없는 환자에게도 여전히 해줄 것이 남아 있다"
서울성모병원은 박씨의 첫 직장이다. 1991년에 입사해 거의 쉬지 않고 일했다. 신입 시절 일반 병동, 암 병동을 거쳐 5년 차에 호스피스 병동을 맡았다. 말기 암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만 31년째다. 얼마나 단단한 마음을 타고난 걸까 싶지만 박씨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한다. "사실 자신은 예나 지금이나 강인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간호대학 재학 시절, 동기들은 그에게 걱정을 섞어 진담인 듯, 농담인 듯 너스레를 떨었다. “너처럼 심성이 여린 사람은 간호사 오래 못한다던데.” 겁도 많았다. 대학병원에 실습을 나가 환자들에게 주사를 놓을 땐 혈관을 놓치거나 엉뚱한 곳을 찌를까 봐 벌벌 떨었다. ‘나처럼 소심한 사람이 과연 병원에서 일할 수 있을까.’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다.
“막상 출근해보니, 환자들이 너무 좋았어요. 출근하고 첫 일주일 동안 제가 살면서 받을 모든 감사를 그분들께 다 받은 거 같았거든요. 신이 났죠.” 저절로 용감해졌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들을 나서서 했다. 신장 이식을 앞둔 환자의 식단을 상담해 주는가 하면, 희소병을 앓는 아이의 부모에겐 병원 도서관을 뒤져 해외 치료 사례를 하나하나 스크랩해 건넸다. 자취방마저 병원 코앞에 구했다. 병원에서 연락이 오면 한달음에 뛰어나가기 위해서. 그만큼 자신의 쓸모를 굳건히 믿었다. 자신이 노력하기만 하면 환자를 나아지게 만들 수 있다는 순수한 믿음이었다.
그런 믿음이 꺾인 건 암 병동에서였다. 신입 시절 맡았던 일반병동과는 고통의 무게가 달랐다. 그에게 유독 각별했던 ‘빨간 모자 할아버지’를 만난 것도 그때쯤이다.
“저를 딸처럼 아꼈던 환자가 있었어요. 항암 치료를 받으며 머리가 다 빠져서 빨간색 털모자를 쓰고 다니시던 60대 환자였죠. 분명 나아지고 있던 중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드시는 족족 모든 것을 토해내기 시작했어요. 무서울 정도로 살이 빠지면서, 순식간에 죽음에 가까워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무척 괴롭더라고요. 환자는 고통스러워하는데, 저는 곁에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고. 처음으로 무력감을 느낀 거죠.”
마음을 줬던 환자를 끝내 잃고 나니, 순식간에 환자를 보는 게 두려워졌다. 그때 한 선배 간호사가 그를 불러 앉혀놓고 담담히 말했다. “치료할 수 없는 환자들은 앞으로도 계속 만나게 될 수밖에 없어.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에겐 그들에게 해줄 것이 남아 있단다.” 그게 다름 아닌 호스피스였다.
“주변 사람들은 말렸어요. 그때 제 나이가 스물여섯 살인데, 너처럼 젊은 애가 어려서부터 왜 그리 무거운 책임을 지려 하냐고. 당시만 해도 간호사들 사이에서 호스피스는 ‘환자를 포기하고 보내는 곳’이라는 인상이 강했거든요. 그런데 전 선배의 한마디 말만 기억나더라고요. ‘여전히 그들에게 해줄 것이 남아있다’는 그 말이요.”
떠나는 환자가 곧 스승이 된 세월

박씨는 호스피스 병동 첫 출근 날의 회진 풍경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병상이 10개뿐이라 마치 반상회 같았다. ‘오늘 기분은 어떠시냐’로 시작해서 ‘오늘 자녀분 퇴근은 몇 시냐, 언제 오시냐’는 살가운 대화가 오갔다. 혹독한 항암치료로 잔뜩 예민해져 환자들 신경이 곤두서 있는 암 병동 분위기와는 딴판이었다. 찬송가부터 동요까지, 자원봉사자들의 경쾌한 노랫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처음엔 ‘여기가 병원인가’ 싶었다. 과거의 자신도 이곳으로 환자를 보내기만 해봤지, 한 번도 직접 와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환자를 놨다’는 죄책감이 앞선 탓이었다.
“암 병동에선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삶을 마감하는 이들만 봐왔는데, 여기선 환자들이 편안한 표정으로 가시는 거예요. 이렇게 다를 수가 있구나. 대부분 ‘여기가 이런 곳일 줄 알았으면 더 빨리 올걸’ 그런 얘기들을 하시더라고요. 다들 임종이 너무 임박한 상태에서 오다 보니, 삶을 충분히 정리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신 거겠죠.”
가본 적 없는 길을 개척하는 게 녹록지만은 않았다. 그가 처음 호스피스 병동에 부임했던 건 1996년, 당시만 해도 국내엔 호스피스 전문가가 전무했다. 완화의료 전문의가 없어서 내과 전문의들이 돌아가며 환자를 보던 시절이다. 그만큼 환자를 24시간 챙기는 간호사들의 역량이 중요했다. “한글로 번역된 책조차 없어서, 외국 전문서를 어렵게 구해 공부했어요. 치료 목적이 아닌 말기 환자의 통증 관리는 어떻게 하는 건지, 해본 사람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책이 알려주지 않는 지식은 환자들로부터 배울 수밖에 없었다.
“유방암 환자였는데, 림프부종이 엄청 심했어요. 손이랑 팔이 부풀어올라서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거예요. 저도 처음 보는 증상이었죠. 너무 고통스러워하시니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팔을 수시로 힘껏 주물러줬어요. 당시만 해도 ‘마사지’라 하면, 손끝에 힘을 꽉 주고 하는 지압이 대부분이었거든요.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그분의 아들이 ‘나도 같이 해도 되냐’고 묻더라고요. 매일 둘이 환자의 양 팔을 하나씩 맡아 같이 열심히 주물렀죠.”
그게 완전히 틀린 방법이었다는 것을 안 건, 연수차 방문한 호주에서였다. “현지 호스피스 의료진이 림프부종 마사지법을 알려주는데, 절대로 세게 주무르지 말라는 거예요. 림프 세포는 너무 세게 자극을 주면 손상된다더군요. 그럼 부종이 더 심해질 수밖에 없고요.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게 올바른 방법이었던 거죠. 당장 비행기표 끊어서 돌아가고 싶었어요. 잘못된 방법으로 환자를 돌본 게 너무 죄스러워서….”
7박 8일의 연수 일정을 마치고 병원으로 돌아왔을 때, 환자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참담한 심정으로 호주에서 챙겨 온 자료를 집요하게 들여다봤다. 림프부종 관리법을 정리해, 같이 일하는 동료들뿐 아니라 다른 호스피스 기관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에게도 가르쳤다.
그는 맡았던 환자들이 임종할 때마다 회고록을 쓴다. ‘이렇게 해봤다면 어땠을까’, ‘저렇게 했다면 경과가 달랐을까.’ 쓸모를 다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을 때마다 구구절절 쓴 반성의 기록은 쌓이고 쌓여 오늘날 임종돌봄의 '표준지침'이 됐다.

매일, 소원을 이루는 곳
병원의 목적이 치료라면, 치료가 끝난 환자들이 모이는 호스피스 병동의 목적은 무엇일까. 박씨는 ‘매일매일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한다.
말기 환자에겐 사소한 게 다 소원이다. ‘오늘은 왠지 계란 프라이가 먹고 싶다’ 하면, 간호사들은 자원봉사자에게 연락을 돌려 “지금 병동으로 계란 프라이 하나요”를 외친다. 손톱을 알록달록 곱게 칠해보고 싶다면, 네일아트숍을 운영 중인 봉사자가 출동한다. 환자가 세상을 떠나기 전 ‘참, 그걸 해봤어야 했는데’라는 아쉬움이 남지 않게 하는 것이야말로, 호스피스 의료진의 가장 중요한 임무다.

“두 살 무렵부터 백혈병 투병을 시작해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온 인생을 병원에서 보낸 아이가 있었어요. 그러니 어린 시절의 추억이랄 게 없었죠. 아이의 첫 소원은 태어나 한 번도 먹어본 적 없었던 생크림 케이크를 먹는 거였어요. 간호사들이 직접 병원 근처 유명 베이커리에 가서 케이크를 사왔죠. 아이가 두 손에 생크림을 묻혀가며 신나게 먹는 모습을 영상으로 담았는데, 어머님이 그 영상을 두고두고 하염없이 돌려 보시더군요.”
아이의 두 번째 소원은 EBS ‘딩동댕유치원’에 나오는 히어로 캐릭터 '번개맨'을 만나는 거였다. 간호팀 전원이 번개맨 뮤지컬 티케팅에 달라붙어 간신히 표를 구했는데, 하필 공연 당일 갑자기 열이 치솟아 공연을 보러 갈 수 없게 됐다. 아이의 상심이 컸다. 다음은 없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의료진이 직접 번개맨이 되기로 했다. 간호사들이 인터넷으로 구매한 번개맨 의상을 담당 교수가 회진 때 입고 깜짝 등장한 거다.
오랜 간병에 지쳐 있던 아이의 부모에겐, 소원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나가는 이 과정 자체가 이별을 준비하는 여정이 됐다. 원없이 먹고 싶은 것을 먹고, 하고 싶은 건 다 해봤던 덕일까. 아이는 예상했던 것을 훌쩍 뛰어넘어 5개월을 더 부모 곁에 머물렀다.
“어느 날은 미술 요법 시간에, 아이가 기차를 타고 엄마·아빠와 함께 하늘나라로 떠나는 그림을 그리더군요. ‘하늘나라는 혼자 가야 해, 엄마랑 아빠는 여기에 있어야 된단다’라고 했더니 아이가 너무 슬퍼하는 거예요. 그래서 기차가 아니라면 어떤 것을 타고 가고 싶느냐고 물었더니, 커다란 핑크색 플라밍고를 꼭 껴안고 가면 엄마랑 아빠 없이도 괜찮을 거 같대요. 그 길로 압구정동으로 달려가 인형 가게들을 다 뒤져서 플라밍고 인형을 구했어요. 아이의 머리맡에 그 인형을 두면, 아이가 죽음을 좀 덜 두려워할 거 같아서요.”
아이는 임종 후 이 플라밍고 인형을 안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인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채 병동을 떠났다.

서른, 관에 누워 보고서야 알게 된 것
지금으로부터 26년 전, 서른 살의 박씨는 차가운 관 속에 누워 있었다. 뚜껑이 닫히고 못 박는 소리가 쾅쾅 울리자 그를 엄습한 건 두려움보단 ‘억울함’이었다.“간호사로서 아직 못 해본 게 너무 많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입관 체험이 끝나고 나서야 자신이 지금껏 환자들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직 죽을 수 없는 이유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얼마나 원통스러웠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껏 환자들의 마음에 공감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겁니다. 내 교만함을 돌아본 계기가 됐죠.”
병동으로 돌아오니 새로운 시야가 열린 듯했다. ‘나중은 없으니 지금 하라’는 환자들의 말이 전과는 다르게 다가왔다.

그로부터 26년 후, 되돌아보니 적어도 하나는 이뤘다고 한다. “임종하는 순간에, 적어도 ‘간호사로서 못 해본 게 너무 많다’는 억울함은 남지 않을 것 같아요.”
멈추고 싶었던 순간은 없었을까. “분명히 힘든 순간은 있었죠. 하지만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환자는 언제나 있잖아요. 그럴 때마다 ‘우리에겐 그들에게 해 줄 것이 있다’는 선배의 말이 떠오르더군요.”
은퇴까진 어느덧 겨우 4년이 남았다. 차근차근 떠날 준비를 하다 보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여전히 많다. 현재 호스피스 입원을 기다리는 대기자가 50명에 이른다. 게다가 국내에서 운영되는 입원형 호스피스는 오직 말기 암 환자만 받는다. 심장이나 혈관 질환으로는 들어올 수 없다. 코로나19를 거치며 병상 수가 줄어든 것은 물론, 그나마도 수도권에 쏠려 있어서, 지방 환자들은 오고 싶어도 올 수가 없다. “적은 비용으로 존엄하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은 이들에게 허락되었으면 합니다.”

그는 5년 전 암 투병을 시작했다. 평생 노동을 섬겨온 사람답게 일을 쉰 것은 겨우 한 달 남짓이다. “나도 환자가 되어보니 하나 좋은 게, 지금껏 돌봐왔던 환자들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겠더라고요. 암환자의 통증이라는 건 이런 거구나,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됐죠.”
끝으로 훗날, 당신의 마지막 순간엔 지금껏 살아온 시간 중 어떤 장면이 떠오를 것 같냐고 물었다.
“전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지만, 간호사로 살았던 세월이 정말 행복했어요. 운이 좋아 제게도 마지막을 준비할 시간이 허락된다면요.
마지막에 떠오르는 건, 역시 지금껏 제가 돌본 환자들의 얼굴일 거 같습니다.”
자신이 배웅했던 그 얼굴들이, 언젠가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러 되돌아오리라고 그는 믿는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대통령 지시에… 주택청약 소득공제, 일몰 없이 상시화한다-경제ㅣ한국일보
- 국힘·한동훈, 배재고 출전 정지에 "대통령도 일베 고백" "과도한 낙인"-정치ㅣ한국일보
- 한혜진·기성용, 결혼 13주년 자축 "늘 고마워, 여보"-문화ㅣ한국일보
- '명청대전'서 갑자기 소환된 친문··· '적통 마케팅' 바라보는 복잡한 속내-정치ㅣ한국일보
- 현직 경찰관 장윤기 아버지 '증거인멸'에도 처벌 안 받는다, 왜-지역ㅣ한국일보
- '5·18 조롱' 배재고, 오늘 경기부터 몰수패 처리…선수 개인 징계 수위는?-사회ㅣ한국일보
- "인천공항까지 69만 원? 북한 가나" 대만 관광객 택시비 바가지 논란-사회ㅣ한국일보
- 배우 최상엽, 이봉원·박미선 아들이었다… "성 바꾸고 데뷔"-문화ㅣ한국일보
- 장윤정 친모, 딸 이름 팔아 투자사기 의혹… 장윤정 측 "연락하지 않아"-문화ㅣ한국일보
- 알바생에 550만 원 합의금 받은 빽다방 점주… 결국 폐점 통보-경제ㅣ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