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으로 확장되는 K-반도체 벨트… 전력, 물, 인재가 성패 가른다

반도체 전문가인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석학교수 겸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이 한 말이다. 그는 최근 정부와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K-반도체 벨트를 기존 수도권에서 서남권으로 확대하는 계획을 발표한 데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서남권에 800조 원 투자

이번 발표가 나온 배경에 대해 박 석학교수는 "현재 조성 중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본격 가동된 후 수도권에 공장을 새로 지으려면 이미 물과 전력이 부족한 상황일 것이다. 해당 지역에선 RE100(재생에너지 100% 사용) 실현이 어려운 점도 현실적 한계"라면서 "메모리 반도체 공급난이 2030년대에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정부와 양대 반도체 기업이 과거 대만이 한 것처럼 새로운 부지에 반도체 인프라를 선제적으로 조성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미 반도체산업 기반이 갖춰진 수도권에서는 추가로 부지와 전력, 물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호남 지역이 반도체 팹 조성에 필수인 전력과 용수 공급 면에서 불확실성을 갖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수도권을 제외하면 어느 지역이나 사실상 제로베이스에서 인프라를 구축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게 전문가들 설명이다. 그런 관점에서 지금 중요한 부분은 '어디'가 아니라 '어떻게'라는 것이다.
정부 계획대로라면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에는 6.3GW(기가와트) 수준의 전력이 필요하다. 이번 3대 메가프로젝트 보고회 때 함께 발표된 대규모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18.4GW) 건설 계획까지 감안하면 원전 24기 이상의 발전 용량이 필요한 셈이다. 호남에 태양광발전 단지가 많은 점을 고려해도 추가 전력 확보가 불가피하다.
"태양광 변동성·간헐성 보완 필요"

"전원의 경우 태양광의 변동성과 간헐성을 보완할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호남의 한빛원전을 기저 전력으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와 함께 대규모 에너지저장장치(ESS)와 양수발전소를 병행 배치하고, 서남권에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소도 추가 건설해야 한다. 송전망 측면에서는 경주, 울산, 부산 기장에 있는 원전에서 생산한 전력을 서남권으로 보낼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 동서축 345kV/765kV 송전망 확충이 필요하다. 동시에 전남 남부 LNG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가 반도체 단지로 원활히 흐를 수 있도록 권역 내 송전망을 지중화하고 계통 연계도 속도감 있게 추진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미래 반도체산업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친환경에너지 수급난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최근 애플은 "2040년까지 자사 제품에 탑재되는 반도체를 전량 RE100 제품으로만 쓰겠다"고 선언했다. 친환경 전력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는 상황이다. 박 석학교수는 이에 대해 "향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RE100을 달성하지 않은 채 탄소배출권만 구입해 제품을 생산한다면 비용 부담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날 것"이라며 "전남광주에 들어서는 반도체 팹의 전력은 풍력, 태양광, 원전 등을 통해 RE100 실현이 가능한 방법으로 확보해야 한다"고 짚었다.
"소득세 감면도 검토할 만"
반도체 생산에는 전력뿐 아니라, 물도 대량으로 요구된다. 특히 반도체 공정에 투입되는 물은 일반 공업용수와 달리 불순물 농도가 1조 분의 1(1ppt) 이하로 관리되는 '초순수(超純水)'여야 한다. 용존산소, 미립자, 금속이온 등이 극도로 제한돼야 하는 만큼 고도의 정제 공정이 필수다. 물의 양뿐 아니라 질도 중요한 셈이다. 이에 대해 유 교수는 "최근 정부가 발표한 것처럼 호남 지역의 댐을 증고(댐 높이를 키움으로써 수량을 더 많이 확보)하고 농업·발전용수를 공업용수로 전환하는 등의 방법으로 당장 쓸 수 있는 수자원부터 통합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유 교수는 "서남권 반도체 공장에서 나온 폐수를 정화해 다시 쓰는 기술을 적극 도입하는 등 산업단지의 수자원 자급률을 높이는 전략도 병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첨단 반도체 단지에 필요한 또 다른 핵심 자원은 인재다. 전남광주 지역 주요 대학에 반도체 관련 학과 및 연구소를 설치해 전문 인력을 육성하는 동시에, 반도체 클러스터 종사자들이 정주할 여건을 조성하는 게 핵심 과제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반도체 클러스터의 성공 여부는 공장을 어디에 짓는지보다 공장 주위에 인재들이 머물러 살 도시를 제대로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렸다"면서 "정부가 단순히 보조금을 지급하는 수준을 넘어 서남권 반도체 공장 종사자들에게 삶의 질은 물론, 자산 형성 측면에서 수도권 종사자를 압도하는 유인책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그의 설명이다.
"3040세대 핵심 인력을 해당 지역에 정착하게 하려면 반도체 클러스터 배후도시에 국제학교, 과학고, 외국어고 등 우수한 교육시설과 상급종합병원을 최우선적으로 유치해야 한다. 대규모 주택을 특별 공급하는 것도 필요하다. 정부가 비수도권 반도체 클러스터에 근무하는 핵심 인력에게 5~10년간 소득세를 감면해주는 등 파격적인 세제 혜택을 제공하는 것도 검토할 만하다. 서남권 반도체 벨트에서 일하는 이들의 실질소득이 수도권 종사자보다 높아지도록 확실한 메리트를 주자는 취지다."
K-반도체 벨트 확장에 참고할 만한 사례도 있다. 대만 수도권과 중부, 남부를 아우르는 대규모 반도체 단지가 그것이다. 대만은 1980년대 수도 타이베이 인근 신주과학단지에 TSMC와 소부장 협력업체, 대학을 유치해 '대만판 실리콘밸리'를 조성했다. 이후 신주과학단지 인프라가 포화 상태에 이르자 1990년대 남부 타이난에 이어 2010년대 중부 타이중으로까지 반도체 벨트를 확대했다. 정부와 기업, 대학이 긴밀히 협력해 반도체산업 생태계를 조성하고, 특히 국가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인프라를 구축한 게 특징이다. 반도체산업계 안팎에서 "우리 정부도 대만처럼 반도체 생산설비와 소부장 공급망은 물론, 인력 양성과 에너지 인프라 확보까지 아우르는 장기 로드맵을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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