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보수 실용주의 흑인 운동가가 걸어온 좁은 길

1954년 미 연방대법원의 인종 분리 교육 위헌 판결(브라운 판결)이 곧장 통합 교육을 구현한 건 아니었다. 거주지 분리 등 현실적 장벽 때문이었다. 1960년대 중반 여러 주가 인권단체 요구를 수용해 ‘강제 통학(forced busing)’이란 걸 법제화했다. 일정 비율의 흑인 아이들을 백인 동네 학교로, 백인 아이들을 흑인 동네 학교로 강제 전학시킨 것. 1971년 대법원은 그 조치도 합헌 판결했다.
지척의 학교를 두고 멀고 낯선 흑인학교로 자녀를 보내게 된 백인 학부모들은 당연히 반발했다. 그들에게 그건 교육권 침해와 자녀 안전 문제이기도 했다. 1974~76년 보스턴에서는 여러 차례 폭동이 일어나 주 방위군까지 투입됐다. 흑인이라고 모두 반긴 건 아니었다. 그들도 어린 자녀가 백인 학교에서 겪게 될 수모와 적대감, 장거리 통학 피로감 등을 우려했다.
보스턴의 젊은 흑인 인권운동가 로버트 우드슨(Robert Woodson)이 반발한 까닭은 좀 달랐다. 그는 제도적 분리- 차별의 장벽을 없애고 선택의 자유를 획득한 건 중요한 성취지만, 숫자 맞추기식 강제 통합은 ‘흑인(학교)=열등(학교)’ 의식을 고착화하고 장기적으로 흑인 커뮤니티의 존엄과 역량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지역 내 좋은 학교를 지키고 육성하는 게 더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인종, 빈곤, 젠더 이슈 등의 원인과 해법을 좌파는 주로 구조와 권력에서 찾고, 우파는 주체(행위자)와 문화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사회과학계의 고전적 문제 중 하나인 ‘구조-주체(Structure vs. Agenc)’ 논쟁. 대개의 경우 원인은 중첩돼 있고, 한쪽의 문제의식을 전면 부정하긴 힘들다. 하지만 현실은, 정치(정책)든 운동이든, 주도권-헤게모니라는 트로피를 건 링 위에서 작동하고, 소모적 대립과 갈등이 그릇된 이분법(False Dichotomy)에서 비롯된다.
우드슨은 보수-실용주의자였다. 인종차별의 역사와 유산, 권력구조보다 당장의 현실 즉 흑인 커뮤니티의 주체적 역량을 키우고 공동체적 가치관을 회복해 내면화한 열등의식을 극복하는 걸 우선시했다. 인종주의 극복의 희망은 끊임없이 반복하는 ‘피해자 서사’가 아니라 “백인들이 최악일 때에도 우리(흑인)는 최선이었던” 극복과 승리의 서사에 있으며, 범죄-빈곤 등 흑인 커뮤니티 문제의 해법 역시 정부나 외부 엘리트 활동가들이 아니라 스스로, 공동체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신념. 흑인 공동체 역량 강화를 위한 풀뿌리 운동단체 ‘전국지역사회기업센터(NCNE, 현 우드슨센터)’를 이끈 그가 별세했다. 향년 89세.

로버트 우드슨은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남부 빈민가에서 나고 자랐다. 대공황기 이주해온 남부 흑인들과 유럽계 백인 노동자들로 북적이던, 범죄와 마약 등 어두운 유혹이 상존하던 지역. 청소년기 그는 길거리 폭력에 친형을 잃고 학교 단짝이 백인 청소년 갱단에게 맞아 숨지는 비극을 겪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인종 분리 부대원(Harlem Hellfighters)으로 참전했던 아버지를 9세 무렵 여읜 뒤 반항아로 성장한 그는 자신과 어린 4남매를 혼자 키운 어머니와도 자주 불화했다고 한다.
그는 고교를 중퇴하고 공군에 입대, 검정고시를 거쳐 1962년 흑인대학인 체이니대(Cheyney State College, 수학 전공)를 졸업했다. 재학 시절 청소년교도소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항공우주공학자의 꿈을 접었다고 한다. “아버지를 잃고 다른 데서 아버지를 찾으려던 아이들”에게서 어린 자신을 본 거였다. 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 등에서 활동하며 1965년 펜실베이니아대 대학원(사회사업학)을 졸업한 그는 강제 통학 파동 직후 주류 운동권 진영을 떠났다.
보스턴의 국제 비영리 인권-정의 구호단체(UUSC)와 도시 빈민 지원단체인 ‘전국 도시 연맹(NUL, National Urban League)’ 등을 거쳐 비영리 우파 공공정책 싱크탱크인 ‘미국기업연구소(AEI)’ 등서 경험과 지식을 쌓은 그는 1981년 정부 지원금 2만5,000달러로 ‘전국지역사회기업센터(NCNE)’를 설립했다. 빈민지역 범죄 척결과 청소년 교육, 지역 경제적 자립 기반 활동을 돕는 단체였다.
그는 청소년 교육 부재와 가난, 범죄가 흑인 커뮤니티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당연히 ‘인종 차별’ 탓만도 아니었다. 워싱턴 D.C 한 빈민 공공주택단지의 다자녀 싱글맘 키미 그레이(Kimi Gray, 1945~2000)의 ‘College Here We Come(대학아, 우리가 간다)’ 프로젝트의 성공이 방증이었다. 마약과 범죄 온상이던 그 단지에서 그레이는 몇몇 이웃과 함께 1974년부터 아이들의 등하교 지도와 방과 후 학습, 진학-장학금 정보를 챙겨주는 등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 이래 단 2명뿐이던 단지 내 대학 진학자는 1980년대 초 6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레이는 그렇게 단지-가난을 벗어난 청년들에게 언제 어떤 식으로든 동생-후배들을 돕고 공동체에 기여하라고 주문했다. 그레이는 우드슨의 주선으로 1982년 정부로부터 단지 ‘주민자치관리’ 권한을 넘겨받았고, 임대료 징수율을 도시 전체 평균의 최대 7배로 높이고 공실률과 범죄율을 격감시켰다. 그레이는 “우리는 루스벨트-케네디-닉슨(민주당) 정부 때나 지금(레이건 정부)이나 늘 가난했다. 나는 어느 정당 지지자도 아니다. 내가 지지하는 건 1달러 지폐다”라고 말했다. 그건 우드슨의 지론이기도 했다. 그는 특정 정당의 ‘묻지마 지지자’가 아니라 캐스팅보트를 쥔 “스윙 보터(Swing Voter)가 돼야 한다”고 역설하곤 했다.
1990년대 말 워싱턴 D.C 한 공공주택단지의 만 12세 흑인 소년이 지역 폭력조직 간 ‘전쟁’에 희생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우드슨은 주민 자치단체(Alliance of Concerned Men)와 함께 라이벌 갱단 대표들을 NCNE 사무실로 초대했다. 방탄조끼까지 갖춰 입고 나타난 그들은 우드슨 등의 주선으로 즉석 평화협정에 서명했고, 이후 12년간 단 한 건의 살인사건도 빚어지지 않았다. 전과자 출신 성인 등과 우범 청소년들을 멘토링 네트워크로 묶어 지도하는, NCNE의 주민 자율 ‘비폭력지대(Violence-Free Zones)’ 프로젝트는 이후 볼티모어와 밀워키 리치먼드 댈러스 등 전국 각지로 확산됐고, 이후 약 30년간 80건 이상의 갱단 간 평화 협정을 중재했다. 텍사스주 베일러(Baylor)대 평가에 따르면 위스콘신주 밀워키의 경우 VFZ 프로젝트 이후 2000년대 중반 학생 1인당 월평균 폭력 사건이 31% 격감하고, VFZ 지역 내 자동차 절도사건이 25%(도시 평균 6%) 감소했다고 평가했다.
미국 범죄 정책 전문가인 예일대 정치학자 베슬라 메이 위버(Vesla Mae Weaver)는 2015년 한 칼럼에서 1968년 린든 존슨 정부의 ‘범죄와의 전쟁’으로 출범한 ‘법집행지원청(LEAA) 사례와 우드슨의 VFZ 프로젝트를 대비하며 “근년 주목받고 있는 ‘지역 밀착형 치안 활동’이 40년 전에 시작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썼다. 막대한 연방 예산이 투입된 LEAA 프로젝트는 한마디로 공권력-교정시설 강화 정책으로, 부패와 예산 낭비라는 지적 속에 1982년 종료됐다. 그 기간 “6,000개가 넘는 새로운 형사사법 기관이 신설됐고, 경찰력은 2배, 경찰 관련 예산은 8배가 증가했다. 1960년대 8년간 감소세였던 흑인 체포 건수는 1970년대 말 4배로 급증했고, 수감률은 10년 새 두 배로 증가했다.”
당시에도 우드슨은 NUL 의장 버넌 조던(Vernon Jordan), 하원 법사위 범죄소위원회 위원장이던 민주당 의원 존 콘이어스(John Conyers)와 함께 지역 차원의 비공식적 범죄 대응력 강화를 줄기차게 요구했지만, 정부 특히 경찰 당국의 외면으로 좌절했다. 우드슨은 “(LEAA는) 소수 인종 청소년 범죄 통계자료를 이용해 예산을 따낸 뒤 실제 공동체나 유권자를 대변하지 않는 조직이 전유하는 일종의 ‘미끼 상술(bait and switch)’이었다”고 비판했다. 칼럼에서 위버는 “범죄와의 전쟁에 흑인들은 참여조차 거부당했다”고 썼다.

미국 공익변호사 출신 법학자 대니얼 해처(Daniel L. Hatcher)는 2016년 저서 ‘빈곤 산업(The Poverty Industry): 미국의 가장 취약한 시민들에 대한 착취’에서 주 정부 복지기관과 민간기업 등이 복지를 앞세워 약자의 주머니를 털어온 실태를 적나라하게 까발렸다. 주 정부가 컨설팅기업에 의뢰해 친부모 사망-장해 등으로 보조금과 수당을 받을 수 있게 된 보호시설 위탁 아동들을 찾아낸 뒤 그들이 받아야 할 수당을 정부 일반 재정으로 편입하는 등 빈곤층을 ‘채굴 가능한 자원’처럼 착취해온 관행.
우드슨은 저 책이 나오기 전인 1980년대부터 ‘빈곤산업’의 실상과 병폐를 폭로했다. “빈곤층 지원 예산의 70%는 빈곤층에게 가지 않고, 그들을 지원한다는 사람들. (… 즉) 해법이 아니라 어떤 문제로 예산을 더 타낼 수 있을지 찾는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우리는 빈곤층을 상품화해놓고, 예산이 늘어날수록 왜 빈곤이 확대되는지 의아해하고 있다.” 우드슨의 ‘빈곤 펜타곤(The Poverty Pentagon)’에는 “봉사해야 할 사람들을 무력화시킬수록, 더 많은 예산-보상을 받는 시스템을 구축해온 사람들(…) 빈곤 확대와 영속화에 기여해온 빈곤-복지 관련 정책-서비스 전문가들과 다수의 복지-민권 운동가들”도 포함됐다.
1960년대 남부 흑인 투표권 운동에도 참여했던 급진 활동가 H. 랩 브라운(H.Rap Brown)이 2000년 조지아주 흑인 보안관 대리 1명을 살해(1명 부상)한 사건으로 떠들썩하던 무렵, 우드슨은 저 사건과 그 지역(Lowndes County) 실상이 ‘민권운동-빈곤-정치 복합체’의 실체를 보여주는 하나의 은유라고 주장했다. 그는 2002년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유권자 절대다수가 흑인이고, 흑인이 정치 요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그 카운티에서 주민 3분의 1은 지금도 트레일러 주택에 살고 있고, 아이들은 석탄 난로밖에 없는 낡은 교실에서 다수가 호흡기 질환으로 등교조차 못 하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반문했다. 그는 “민권운동은 기본적 권리(투표권)를 회복한 초기 성공 이후 가난하지 않은 이들의 지위를 향상하기 위해 가난한 흑인들의 곤경을 이용해왔다”고, “그건 전형적인 미끼 상술”이라고 비판했다. 즉 인종 프로파일링이나 남부연합기 같은 인종적 불관용의 상징물에만 집착하며 주민들의 실질적인 삶의 조건은 외면하는 진보 진영의 위선. “나는 방금 정화조가 없다는 이유로 자신이 거주하던 곳에서 쫓겨나게 된 90대 할아버지를 만나고 왔다. 퇴거당한 그를 돌보느라 카운티가 써야 할 돈은 당연히 정화조 설치 비용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 행진을 재현하는 이들이 그가 사는 곳에서 불과 몇 마일 안 되는 거리를 지나가지만, 그들 중 누구도 그 노인과 같은 이들의 처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는 모든 이슈에 ‘흑인=피해자’ 서사를 들이미는 주류 운동권 진영을 향해 “이제 테이블에서 인종을 치우라(Race off the Table)”고 주장했다. 그는 몇몇 민주-공화당 정치인과 레이건-부시 정권의 빈곤-주택 정책 등을 자문했고, 트럼프 1기 정부의 주택도시개발부 장관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는 주류 진보 운동권 진영으로부터 보수 백인들의 논리에 세뇌된 ‘엉클 톰’이라는 비판-비난을 받아왔다. 심리학자 겸 흑인 인권운동가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는 우드슨을 “흑인 문제를 흑인 탓으로 돌림으로써 공동체 결속을 해치”며 “백인 보수진영에 이용당하는 자”라고 평했다.

사실 “이용당한” 면이 적지 않았다. AEI의 저명 보수 논객 디네시 디수자(Dinesh D’Souza)가 1995년 책 ‘인종주의의 종언(The End of Racism)’이란 책에서 우드슨의 철학을 교묘히 비틀어 인종적 문제를 흑인 문화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우드슨은 책에 담긴 인종주의를 조목조목 비판하며 AEI와의 20년 협력 관계를 끝내겠다고, 뉴욕타임스 칼럼에 썼다. 그는 레이건 정부의 지역 주도 복지 정책에는 적극 동조했지만, 전통적인 시혜성 복지 정책에는 반대했다. 예컨대 그는 미혼모 수당이 흑인 가정의 아버지 부재 현상을 악화시켜 가족 해체를 조장한다고 비판했고, 대학 입학과 채용, 승진 등에서 소수인종을 우대하는 ‘인종 기반 우대 조치(Affirmative Action)’ 역시 “차별을 차별로 극복하려는(…) 기대 수준 낮은 유화적 인종 차별(soft bigotry)"이라던 텍사스 주지사 시절의 조지 W. 부시의 입장에 동조했다. 우드슨은 우대조치의 혜택 역시 비교적 잘 준비된 중상층 흑인에게만 집중돼 공동체 내 격차와 분열까지 조장한다고 비판했다.
사실 우드슨의 철학과 지향을 비판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는 주택 정책에서의 구조적 인종차별인 ‘레드라이닝’이나 경찰-공권력의 인종차별 등 차별의 역사와 구조적 유산을 경시하거나 외면했고, 주류 인권운동 진영의 여러 값진 성취에 대한 평가에도 대체로 인색했다. 마찬가지로 그에 대한 좌파 진영의 조롱과 비판도 과도했다. 그가 모든 책임을 피해자인 흑인에게 돌린다(Blaming the Victims)는 것도 지적 논쟁을 도덕적 비난으로 전환시킨 예일 것이다. 그가 탓한 것은 흑인=피해자가 아니라 흑인 피해자성을 부각함으로써 그가 보기에, 그걸 영속화-내면화해온 정책과 운동이었다.
우드슨은 1990년 ‘맥아더 재단’이 개인의 독창성과 잠재력을 평가해 매년 수여하는 ‘맥아더 천재 상(Genius Grant)’을 받았다. 맥아더 재단은 기후-인종 정의와 다양성을 중시해온 진보 성향 재단이다.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비영리단체인 우드슨센터는 미국(흑인) 역사와 청소년 교육, 비폭력, 폭력피해 가정 지원 등 사업을 펼치며 근년까지 미국 전역 약 800개 이상 풀뿌리 지역단체에 5,500만 달러(약 760억원)를 연구 및 활동 지원금 형태로 투자하고 2,600여 명의 지역 리더들을 배출했다. 우드슨은 2016년 NCNE 리더십을 후배 활동가들에게 넘긴 뒤 창립 40주년이던 2021년 공식 은퇴했고, 후임자들은 단체명을 우드슨센터로 헌정-개명했다. 그는 1977년 결혼한 아내(Ellen Hylton)와 4남매(장남은 2003년 작고)를 두었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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