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동에서] 이율배반의 민주주의, 선관위 사태와 '시빌리테'

6·3지방선거 관련 선관위 사태의 문제는 단순히 선거 결과에 대한 찬반이나 특정 정당의 유불리에 있지 않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선거 과정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흔들렸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는 결과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국민이 선거의 절차를 신뢰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안정적으로 작동한다.
최근 선거를 둘러싼 논란 속에서 부정선거, 재선거, 당일투표, 수개표 등의 구호가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목소리는 선거 시스템에 대한 불안과 불신이 표출된 결과일 것이다.
국민은 선거 제도에 대해 질문할 권리가 있으며 국가는 그 질문에 답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이번 사안을 무조건 음모론으로 치부하거나 반대로 사실로 단정하는 태도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투명한 검증과 국민적 신뢰의 회복이다.
여기서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는 왜 이러한 불신이 생겨났는가 하는 점이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다. 오늘의 상황을 당시와 같게 볼 수는 없지만, 선거에 대한 불신이 사회를 흔들 수 있다는 점만은 바로 4·19혁명이라는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이번 사태를 결코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현상은 청소년과 청년 세대의 움직임이다. 최근 나타나는 젊은 세대의 목소리는 기존 정치 시스템에 대한 문제 제기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들의 생각이 모두 같지는 않지만 변화 요구가 확산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우리는 왜 젊은 세대가 거리와 광장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는지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선거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해법이 반드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어야 하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수개표 확대를 주장하는 목소리에도 이유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이 다시 세는 행위 자체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조작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국민 누구나 검증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결국 이번 선관위 사태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수개표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다. 진짜 질문은 어떻게 하면 국민 누구나 신뢰할 수 있는 선거 시스템을 만들 것인가에 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특정 개인이나 기관이 임의로 건드릴 수 없는 시스템이다. 다수의 독립된 주체들이 동시에 검증할 수 있는 분산형 신뢰 구조와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투명성이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프랑스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Etienne Balibar)의 통찰은 의미가 있다. 그는 민주주의가 본질적으로 이율배반을 안고 있다고 보았다. 자유를 확대하면 갈등도 확대되고, 평등을 추구하면 또 다른 긴장이 발생한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모순을 없애는 체제가 아니라 조정하고 관리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시빌리테(civilite)를 강조했다. 시빌리테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상대를 제거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함께 살아가기 위한 시민적 태도다.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도, 제도를 신뢰하는 사람도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약해진다.
우리는 인공지능이 사회 전반을 바꾸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선거에 대한 신뢰 역시 사람의 선의가 아니라 시스템을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 공동체의 공정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방법 또한 시대와 함께 발전해야 한다.
AI 시대의 민주주의는 국민에게 신뢰를 요구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국민이 직접 신뢰를 확인할 수 있는 민주주의여야 한다. 미래의 민주주의는 믿음을 강요하는 체계가 아니라 투명성을 통해 신뢰를 증명하는 체계 위에서 완성될 것이다.
/이문웅 작가·<동아시아 오딧세이>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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