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하늘에서 본 영산포와 죽산보의 물길 [앵+글로 본 남도세상]




# 봄, 바람이 실어 온 흑산도의 짠내와 황포돛배
봄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영산강 위로 붉게 황톳물을 들인 황포돛배가 물살을 가른다. 드론을 강물 가까이 낮춰 배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600여 년 전 이 물길을 거슬러 오르던 흑산도 사람들의 고단한 여정이 겹쳐 보인다.
고려 말, 잦은 왜구의 노략질을 피해 육지로 스며든 흑산도(당시 영산현) 사람들은 남포강가에 터를 잡고 고향의 이름을 따 이곳을 '영산'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바다를 잊지 못했던 이들은 돛단배에 의지해 보름(15일) 가까운 시간을 들여 고향 앞바다까지 나가 조업을 했다.




# 가을, 황금빛 평야에 드리운 수탈의 그림자
가을이 되면, 드론의 고도를 높여 나주평야의 광활한 황금빛 들녘을 조감한다. 1897년 목포 개항 이후, 일본인들은 이 풍요로운 나주평야의 쌀을 노리고 영산강 뱃길을 따라 내륙 깊숙한 영산포로 진출했고, 영산포에는 많은 일본인 거류민이 정착해 거대한 일본인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주변의 쌀은 모두 이곳으로 집결해 목포항을 거쳐 일본으로 빠져나갔다.
카메라를 마을 안쪽으로 향하면, 당시의 흔적들이 근대 문화유산이라는 이름으로 화석처럼 남아 있다. 일본인 사업가 구로즈미 이타로가 소유했던 것으로 알려진 적산가옥, 구 조선식산은행(현 영산포 역사갤러리), 일제 토지 수탈의 상징이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영산포 지점 문서고 등이 있다.
# 겨울, 멈춰 선 물길을 지키는 묵언의 이정표
차가운 강바람을 맞으며 우뚝 서 있는 하얀 등대 하나가 프레임 한가운데로 들어온다. 바다가 아닌 강변에 세워진 우리나라 유일의 내륙 등대, 영산포 등대(국가등록문화유산 제129호)다.
1915년 가항 종점이었던 영산포 선창에 세워진 이 구조물은 그냥 길잡이가 아니었다. 영산강 하굿둑이 생기기 전, 영산강은 바닷물의 조수 간만의 차이가 내륙 깊숙이 미치는 감조하천이었다. 등대의 기단부에 새겨진 눈금은 잦은 범람 때마다 수위를 측정하는 '자기수위표(조위표)' 역할을 겸했다.
1970년대 후반 하굿둑 건설로 뱃길이 끊기면서 수운의 이정표로서의 생명은 다했지만, 겨울밤 영산포 등대가 뿜어내는 불빛은 과거 화려했던 포구의 기억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 사계절을 관통하는 대지의 흉터: 물길을 긋고 가둔 인간의 시간
하늘에서 내려다본 영산강 중하류는 거대한 개발의 흔적을 품고 있다. 인간이 자연의 물길에 개입하여 남도의 지형과 생태를 뒤바꿔 놓은 두 번의 거대한 사건이 이곳에 새겨져 있다.
과거 영산강은 뱀처럼 유장하게 굽이쳐 흐르는 전형적인 자유곡류하천(自由曲流河川)이었다. 수해를 막고 농경지를 억지로 늘리기 위해, 1980년대 굽이진 물길의 목(곡류 경부)을 인위적으로 절단하는 대대적인 직강화(直江化) 공사가 벌어졌다.


# 멈춰버린 흐름, 죽산보의 명암(2012년)
직강 공사가 강의 '형태'를 폈다면, 4대강 사업으로 건설된 죽산보는 강의 '흐름'을 콘크리트 장벽으로 가둔 사건이다. 수량 확보와 친수 공간 조성을 목적으로 세워져 황포돛배가 다시 뜰 수 있게 되었지만, 생태계가 치른 대가는 크다고 할 수 있다.
보 건설 이후 강 수위가 높아지면서 주변 농경지와 시설하우스의 지하수위 상승 문제가 제기되었다. 유속이 느려진 강에는 여름마다 녹조 현상이 나타나곤 했다. '죽산보 완전 해체'와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존치'라는 엇갈린 정치적 결정 속에서, 죽산보는 농업, 생태 복원, 기후 변화라는 복잡한 과제가 충돌하는 뜨거운 논쟁의 현장으로 남아 있다.
영산포와 영산강의 사계절을 공중에서 조망하는 작업은, 아름다운 풍경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이 땅이 겪어 온 시간을 시각적으로 탐구하는 일이다. 고향을 잃은 자들의 피난처에서 남도 물류의 심장으로, 수탈의 전초기지에서 인위적인 생태 개조의 실험장으로. 드론을 착륙시키며 다시금 바라본 영산강은, 인간의 욕망과 자연의 순응이 교차하는 길목이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