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철의 스포츠 브레인] 공만 돌리다 월드컵이 끝났다...감독의 뇌가 '이기는 목표'를 잊어버렸을 때

김기철 2026. 6. 29.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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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전 패배에 고개숙인 한국 대표팀 / 사진=연합뉴스
비기기만 해도 됐다. 지난 6월 25일 목요일 남아공전은 무승부만 거둬도 A조 2위로 32강이 확정되는 경기였다. 그런데 졌다. 한국은 조 3위로 내려앉았고, 그 순간부터 사흘간 나라 전체가 다른 나라 경기 결과를 초조하게 들여다보는 신세가 됐다.

세네갈이 이라크를 5-0으로 대파했다는 소식에 한숨이 나왔고, 이란이 이집트와 1-1로 비겼다는 소식에 또 한숨이 나왔다. 6월 28일 일요일 오전, 콩고민주공화국이 우즈베키스탄을 3-1로 꺾으면서 모든 게 끝났다.

한국은 48개국이 참가한 이번 월드컵대회에서 32강 진출에 실패했다. 손흥민, 김민재, 이강인, 황인범 등 역대 어느 월드컵 스쿼드보다 화려하다고 했다. 그 역대급 스쿼드가 1998년 이후 28년 만에 조별리그에서 짐을 쌌다.

그렇다면 왜 비기지도 못했을까. 남아공전 90분을 돌이켜보면 답이 보인다. 공이 앞으로 가지 않았다. 이강인이 받아서 옆으로, 황인범이 받아서 다시 뒤로, 수비수가 받아서 또 옆으로, 공은 하프라인 주변을 맴돌았고 상대 진영을 파고드는 장면이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남아공 수비가 골문 앞에 벽을 쌓고 기다리는 동안 한국은 그 벽을 뚫을 시도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마지막 월드컵대회가 될 수 있는 캡틴 손흥민을 충분히 활용하지 않는 전술도 그대로였다.

경기 당일 해설을 맡은 박지성은 "오늘 경기를 이기려고 나왔느냐라고 봤을 때 그런 모습이 전술 상황에서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많은 팬들이 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기려 했던 걸까, 지지 않으려 했던 걸까.

도대체 감독의 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인지심리학에 '목표 망각'이라는 현상이 있다. 어떤 행동을 장기간 반복하다 보면 원래 그 행동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잊어버리는 상태다.

회의를 오래 하다 정작 무엇을 결정하려 했는지 잊는 것, 보고서를 다듬다 보고서를 왜 쓰는지를 놓치는 것과 같은 원리다. 뇌의 판단 사령탑인 전전두엽이 장기 목표인 '골을 넣어 이긴다'보다 익숙한 루틴인 '공을 안전하게 돌린다'에 점점 더 많은 자원을 쏟기 시작한다. 목표가 흐려지고 수단이 목적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절차적 경직'이 겹친다. 어떤 행동 방식이 강하게 몸에 배면, 뇌의 기저핵이라는 부위가 그 패턴을 자동화해버린다. 자전거를 한번 배우면 생각 없이 탈 수 있는 것처럼, 반복 훈련된 전술은 뇌가 의식적 판단 없이 실행하는 자동 모드가 된다.

문제는 상황이 바뀌어도 자동 모드가 꺼지지 않을 때다. 0-1로 뒤진 상황에서도 홍감독은 공격수를 늘리는 대신 스리백을 유지했고, 수비 자원을 또 다른 수비 자원으로 교체했다. 경기 후 홍감독은 "왜 갑자기 이런 경기력이 나왔는지 나도 코칭스태프도 좀 당황스럽다"고 했고, 패인을 묻는 질문에는 전술이 아닌 환경적 요인을 언급했다. 그 말 자체가 목표 망각의 증거였다.

홍명보 감독 / 사진=연합뉴스

교각살우(矯角殺牛). 소의 굽은 뿔을 바로잡으려다 무리하게 힘을 써서 결국 소를 죽이고 만다는 뜻이다. 좋은 의도가 더 큰 손실을 낳는 상황을 가리킨다.

홍명보 감독이 추구한 점유율 기반의 안전한 빌드업이 나쁜 의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골을 넣어야 이기는 경기에서 공만 돌리다 졌다. 전술의 완성을 지키려다 팀의 가장 날카로운 무기를 스스로 봉인했다.

홍감독은 29일 멕시코 사포판 베이스캠프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 여러분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결과와 책임은 모두 감독인 저에게 있다"며 사퇴 의사를 밝혔다. 2024년 7월 선임된 지 781일 만의 불명예 퇴진이었다.

이강인은 눈물을 보이며 "너무 죄송한 마음이 크다"고 했다. 손흥민은 "우리 손을 떠난 거니까 어떤 결과가 와도 받아들여야 될 것 같다"고 했다. 사실상 마지막 월드컵이었을 손흥민의 도전이 남아공전 후반 교체 출전으로 끝났다.

한국 축구를 사랑하는 팬들은 이번에도 끝까지 응원했다. 목요일 오전 업무를 내려놓고 경기를 지켜봤고, 조3위 확정 이후 다른 나라 경기 결과를 뒤지며 경우의 수를 계산했고, 일요일 아침 탈락 소식에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JTBC는 탈락이 확정되는 순간 엔딩곡으로 권진아의 '진심이었던 사람만 바보가 돼'를 흘려보냈다. 그 노래 제목이 이번 월드컵을 가장 정직하게 요약했다.

2006년 이래 처음으로 별도의 귀국 행사도 없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번 월드컵 본선 진출 실패는 조직과 인사의 실패"라고 진단하며 체육행정 개혁을 신속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팬들의 진심이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감독 한 명의 퇴진으로 끝낼 일이 아니다. 뿔을 고치기 전에 소가 살아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하듯, 새 감독을 선임하기 전에 축구협회가 먼저 뼈대부터 달라져야 한다.

[김기철 마니아타임즈 기자 / maniarepo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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