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몰빵·대구경북 패싱’, 국가 경제 근간 흔든다…제대로 문제 제기하는 TK 정치인 없어

한상갑 기자 2026. 6. 28. 20:01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인선 의원을 비롯한 대구-경북지역 국민의힘 의원들이 25일 국회에서 광주·전남권 제2국가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계획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구미시는 반도체 산업에 필요한 전력, 용수, 인프라, 첨단 인력 등 핵심 조건들을 이미 상당 부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진은 구미국가산업단지 모습. /구미시 제공

정치권에서 이른바 ‘호남 1000조 원 투자론’이 흘러나오고 있다. 실제 거론되는 규모는 400조 원 안팎으로 알려졌지만, ‘1000조’라는 과장된 숫자는 대구·경북 주민들에게 더 큰 박탈감과 위기감으로 다가오고 있다.

문제는 투자 규모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전력과 물, 산업 기반에 대한 냉정한 검증 없이 숫자만 앞세운 정치 구호가 국가 산업정책처럼 포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반도체와 로봇, AI산업, 데이터센터는 정치적 결정이나 선언만으로 유치할 수 있는 산업이 아니다. 24시간 끊기지 않는 전력, 막대한 산업용수, 숙련된 고급 인력, 촘촘한 협력업체망, 물류 인프라, 정주 여건이 동시에 갖춰져야 한다.

◇호남에 수백조 프로젝트 감당할 인프라 있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호남이 이 정도 규모의 첨단산업 투자를 감당할 수 있느냐에 대한 현실적 검증이 먼저”라는 지적이 나온다. 호남은 그동안 풍력과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중심 정책에 무게를 둬 왔다. 이른바 ‘햇빛연금’으로 대표되는 지역형 복지 모델도 만들어냈다. 그러나 반대로 화력발전소나 원전 같은 기저전원 확충에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이만희(영천시·청도군) 의원은 페이스북을 통해 “용인 등 기존 경기 반도체 클러스터도 아직 준비 중인데 전력도, 인력도, 산업생태계도 부족한 호남에 투자한다면 정치적 외압 없이 기업 스스로 이런 결정을 내렸을 것이라고 누가 믿겠냐”고 밝혔다.

친환경 논리를 앞세워 대규모 발전(發電) 인프라 구축에는 신중하거나 소극적이었던 지역이 이제 와서 초대형 첨단산업 투자를 요구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오염시설은 싫고 첨단공장은 달라는 식으로는 국민을 설득하기 어렵다”며 “그런 부담을 감수해 온 타 지역에 대한 보상은커녕 개발에서 배제하려 한다면 국민적 비판을 불러올 수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 산업벨트 짓는데 최소 20년 소요

현재 전남 영광(한빛원전) 6기 발전 설비용량은 약 5.9GW로, 호남권 첨단산업 투자가 요구하는 전력을 기초적으로는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24시간 가동되는 반도체 공장의 특성을 고려하면 안정적인 전력 공급 로드맵이 반드시 뒷받침돼야 한다.

매일경제신문은 24일자 사설에서 “호남에 재생에너지 발전 설비가 많기는 하지만, 송전망이 턱없이 부족하다. 반도체는 정전이 되면 웨이퍼 라인이 통째로 폐기돼 천문학적인 경제적 피해를 입는다”며 “이를 극복하려면 에너지저장장치(ESS)가 대규모로 확충돼야 하는데 정부는 그 청사진부터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정치권에서 부각되는 것은 로드맵이 아니라 숫자다. 원전 한 기를 짓는 데만 부지 선정부터 상업운전까지 통상 12~15년이 걸린다. 송전망과 용수관로, 산업단지 조성, 인력 정주 기반까지 고려하면 20년 안에 완성도 높은 반도체 산업벨트를 새로 구축하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TK는 물론 수도권-충청권 반발도 거세

정부의 일방적인 ‘호남 프렌들리’ 정책 역시 적지 않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 수도권과 충청권의 반발도 이미 감지된다. 경기 남부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반도체 클러스터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지역 산업 종사자들과 주민들은 국가 투자와 정책 지원이 호남으로 집중되면 기존 반도체 벨트의 성장 동력이 약화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충청권의 기류도 심상치 않다. 호남 반도체 산업단지에 필요한 용수를 대청댐에서 공급하는 방안이 거론되면서 지역 반발이 커지고 있다. 호남은 그동안 4대강 보 해체와 환경 논리를 앞세워 산업용수 확보 기반을 약화시켰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타지역 수자원을 활용하겠다는 구상이 나오자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정진석 전 의원이 “반도체는 호남에 몰빵하고 충남은 물만 대라는 것이냐”는 취지로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최근 충청권 일각에서는 “삼성은 호남으로 가고 SK하이닉스는 충남으로 와야 되는 것 아니냐”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호남 집중 투자론이 오히려 충청권의 협상력을 높이는 역설적 상황을 만들고 있다. 호남이 대규모 투자 구상을 내세울수록 다른 지역의 경계심과 반발도 커지는 구조다.

◇구미는 용수·전력-협력 업체 모두 완비

첨단산업, 반도체 공장은 전력과 용수, 산업 생태계, 인재와 기업이 모여야 비로소 들어선다. 그런 점에서 경북은 이미 출발선이 아니라 본선 무대에 올라와 있는 지역이다.

경북은 반도체 산업에 필요한 핵심 조건들을 이미 상당 부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먼저 경북은 안정적인 전력 기반을 확보하고 있다. 경주(5기)와 울진(8기) 등 모두 13기 원전이 상업운전 중이며, 낙동강 수계를 중심으로 한 산업용수 확보 여건도 탄탄하다.

더구나 구미는 오랜 기간 전자산업과 제조업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국가산업단지, 숙련 인력, 협력업체 네트워크, 물류망을 이미 갖추고 있다. 첨단산업 유치를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하는 지역과는 출발선 자체가 다르다. 특히 김장호 구미시장이 제시한 파격적인 산업용지 공급 구상은 기업 입장에서 충분히 검토할 만한 카드로 평가된다.

◇8월 전당대회·총선 대비한 정치적 메시지?

이런 갑작스런 ‘호남 우대론’, ‘대구경북 패싱’ 등은 8월 민주당 전당대회나 2028년 총선을 대비한 정치적 메시지라는 분석도 있다. 지역균형발전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특정 지역 표심을 겨냥한 정치 구호에 가깝다는 의구심을 낳고 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호남 수백조 투자론은 현실성 측면에서 적지 않은 의문을 안고 있다”며 “전력과 용수, 산업 인프라에 대한 타당성 조사, 지역 안배 없이 정치적 선전에만 매달린다면 결국 정권에 정치적 부담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이는 호남 발전에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호남 고립론’을 키우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

정치권, 특히 국민의힘의 침묵도 이해하기 힘들다는 반응이 많다. 몇몇 의원들을 제외하면 대구경북 정치인들조차 호남 집중 투자론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당내 권력 경쟁과 내부 갈등에 매몰된 사이, 지역 산업의 미래가 걸린 문제에는 손을 놓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산업은 정치 메시지로 움직이지 않는다. 반도체는 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전력과 용수, 인재와 기업 생태계를 따라 움직인다. 특정 지역에 대한 정치적 배려가 국가 산업정책을 대신할 수는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디가 가장 경쟁력이 있는가’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다.

/류승완·한상갑기자

Copyright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