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호의 월드컵 파일] 1986 멕시코 월드컵 이탈리아전 '원더골'의 비밀
"비우니 보였다"…내 축구 인생을 바꾼 멕시코월드컵

[더팩트 | 최순호 전 국가대표] -비우니 채워진 축구, 집착을 버리고 얻은 평온
생각을 바꾸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고 몸도 가벼워지는 듯했다. 월드컵이라는 세계 최고의 무대가 주는 중압감, 그리고 반드시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경쟁과 결과에 대한 집착은 되레 발목을 잡는 족쇄였다. 그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현실을 온전히 받아들이니, 굳어있던 몸과 마음이 풀리며 생활과 훈련은 다시 즐거움으로 돌아왔다.
에이스라는 무거운 왕관의 무게보다 팀의 일원으로서 맡은 역할에 충실하려 노력했고, 동료들과 땀 흘리며 함께하는 대표팀 생활의 소중함도 새롭게 느낄 수 있었다. 동양의 고전 '장자(莊子)'에는 ‘허실생백(虛室生白)’이라는 말이 나온다. 방을 비워야 비로소 환한 빛이 들어오듯, 마음의 욕심을 비워내자 축구를 대하는 시야가 넓어졌다. 지나간 경기의 아쉬움에 연연하기보다 앞으로 다가올 기회를 묵묵히 준비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자 마음의 부담은 씻은 듯 사라졌다. 비로소 축구를 처음 시작했던 유년 시절의 순수한 즐거움이 다시 나를 웃게 만들었고, 그라운드는 더 이상 전쟁터가 아닌 즐거운 놀이터가 되었다.

-고통의 터널 끝에 만난 1986년 6월 10일의 기적
아프고 무거웠던 인고의 시간, 그리고 생각을 바꾸며 얻은 결과는 기대 이상으로 놀라웠다. 마음을 비우고 맞이한 1986년 6월 10일, 멕시코 푸에블라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우리는 당대 세계 축구 강국이자 디펜딩 챔피언이었던 이탈리아와 마주했다. 부담감을 내려놓은 발끝은 가벼웠고, 머리는 명석했다. 그 경기에서 나는 1득점 1도움을 기록하며 세계 최강을 상대로 대한민국 대표팀의 매서운 선전에 힘을 보탰다.
특히 후반전, 페널티박스 외곽에서 이탈리아 수비진을 무력화하며 골문 구석을 찌른 나의 슛은 ‘1986 멕시코 월드컵 아름다운 골 TOP 10’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 골은 이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한 방송국의 하루 시작과 종료를 알리는 애국가 영상 속 단골 화면으로 오랫동안 사용되며 큰 사랑을 받았다. 모진 바람이 불어봐야 비로소 강한 풀을 알아본다고 하듯, 힘겨웠던 고통의 시간을 견디며 얻은 결실이었기에 내 축구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고 소중한 순간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홀로 서 준 아내와 청주의 스승들, 내 삶의 진정한 버팀목
월드컵이라는 거대한 폭풍을 마치고 귀국한 고국 땅에서, 나는 무엇보다 가족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멕시코에서 세계적 스타들과 몸을 부딪치는 동안, 만삭의 아내는 머나먼 이국땅의 남편을 걱정하며 홀로 외로운 생활과 출산의 두려움을 묵묵히 이겨냈다. 숭고하리만치 강인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준 아내는 내게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아들을 선물해 주었다. 가장 극적인 순간에 찾아온 가족의 탄생은 월드컵의 그 어떤 골보다 값진 축복이었다.
곧바로 부모님을 찾아뵙고 감사의 큰절을 올린 뒤, 나의 축구 미학이 싹텄던 고향 청주의 초·중·고 시절 스승님들을 찾아뵈었다. 엄하고도 따뜻하게 나를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들은 제자의 활약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눈시울을 붉히셨다.
가만히 돌아보면 오늘의 ‘축구인 최순호’를 있게 한 것은 결코 나 혼자만의 재능이 아니었다. 수많은 분들의 보이지 않는 사랑과 헌신, 그리고 올바른 가르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유·청소년 시절부터 초록빛 그라운드 위에서 올곧게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모든 스승님과 포용해 준 팬들에게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결코 자만하지 말라며 나를 채찍질하고 안아주었던 그분들의 헌신과 정성은, 내가 평생을 살아가며 갚아야 할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은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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