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동네로 알려진 아치울, 내게는 아버지 살린 마을

유영현 2026. 6. 27.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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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권하는 의사 유영현의 1+1 이야기] 57. 기억의 원리, 그리고 차(茶)
왼쪽부터 경기도 구리시 아치울 전경(빌드빌드), 뇌에서 기억의 담당 영역(사이언스올), 기억의 재공고화(mertsplus). 사진=유영현 제공

첫째 고모부 부음을 받았다. 올해 우리 나이로 100세에 이생의 삶을 다하셨다. 두 살 아래 첫째 고모는 몇 달 전 이 세상을 떠났다. 고모부는 아치울(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태생이다. 고모님의 시댁이 아치울이란 얘기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를 숨겨준 마을, 아치울

아치울 사람들은 아버지 때문에 한국전쟁 중 특별한 체험을 한다. 지난 칼럼 '내가 티백 홍차는 마시지 않는 이유'에서 해당 사건을 일부 발췌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아버지 소속 군대는 폭파된 한강을 넘지 못하였다. 군인들이 한강 주변에서 우왕좌왕하니 주민들이 옷을 들고 나타났다. 아버지도 그들이 가져온 민간인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버지는 아치울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다행히 아치울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아버지는 서울 수복까지 목숨을 지켜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버지 집에서 하인을 가장하며 북한 치하의 서울에서 목숨을 부지하였다."

아치울 마을 사람들의 도움은 한 줄로 표현할 수 없는 긴 사연을 품고 있다. 다락에만 숨어 지내기 지겹던 아버지가 집 밖으로 외출하셨을 때 나타난 북한 군인을 따돌리던 아슬아슬한 상황, 마침내 국군의 존재를 의심한 북한 군인들의 급습. 지하로 피하시며 이불 흔적을 남기셔 추적당하셨던 아버지. 숨은 아버지를 보호하기 위해 주민들이 벌인 연극.

그리고 전쟁 전에 만나 사귀던 아버지를 만나려 어머니가 아치울을 찾은 장면. 이 치열하였던 생존의 이야기에 관련된 거의 모든 분이 이 땅에 더는 없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아버지가 마을에 숨은 사실을 알게 된 아치울 마을 사람들은 모여서 김씨집 새댁 친오빠를 지키기로 합의하셨다. 이 위험을 수개월 감수한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아버지는 평생 잊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이 이야기를 자주 말하셨다.

아치울 출신 고모부에 대한 각별한 감정도 늘 표하셨다. 동갑에 처남 매부이기도 했던 두 분은 누구보다 친한 친구로 지내셨다. 두 분은 만날 때마다 진하게 포옹하셨다.

마지막까지 남은 기억은 감사였다

2002년 월드컵이 열리던 해였다. 온 나라가 축구 열기로 들썩이던 때 아버지는 식도암이 뇌로 전이되어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 당일 소천하셨으니 조별 리그가 진행될 때 이미 인지 기능은 많이 흐려져 있었다. 말이 엉키기도 했고, 기억이 뒤섞이기도 했다.

그런데 숨을 거두시기 며칠 전까지도 아버지는 아치울 이야기를 또렷하게 했다. 그 기억만큼은 꽤 생생했다. 조별 리그가 진행되던 때에 특유의 존댓말 투로 "아치울 사람들, 참 고마운 분들이었어요"라 말하셨다.

이 말이 아버지께서 온전한 문장으로 표현하신 마지막 말이다. 아치울에서 생사를 넘나들던 사건은 아버지의 가장 깊은 기억 심연에 자리하고 있었다.

왜 아치울에서의 기억이 마지막까지 남았을까. 왜 판단력이 흐려지고 현재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상태에서도 그 기억만은 사라지지 않았을까. 이 질문은 인간의 기억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기억은 문서가 아니라 연결망이다

기억은 단일 사건으로 정리된 문서가 아니다. 사건이 나면 이를 뇌 어디엔가 기록하고 그 기억이 단일 문서처럼 남아있다고 생각하지만, 뇌에서 기억은 그렇게 저장되지 않는다.

기억은 뇌 전체에 걸쳐 퍼져 있는 네트워크 속에 존재한다. 어떤 사건을 경험하면 그 사건은 하나의 단순한 정보로 저장되지 않는다. 눈으로 본 장면, 귀로 들은 소리, 몸으로 느낀 감각, 그 순간의 감정, 주변 사람들의 얼굴, 말의 의미, 공간의 느낌 같은 것들이 각각 다른 뇌 영역에 기록된다.

처음 기억이 형성될 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구조는 해마라 불리는 부위다. 해마는 새로운 기억을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오늘 있었던 일, 방금 나눈 대화, 최근에 만난 사람의 얼굴 같은 단기 기억은 처음에는 해마에 의존한다.

시간이 지나면 단기 기억은 해마에서 대뇌피질의 여러 영역으로 이동한다. 그래서 오래된 기억은 해마가 아니라 대뇌피질의 넓은 네트워크 속에 존재하게 된다. 단기 기억은 충분히 퍼지지 않아 제한된 회로에 의지하지만, 오래된 기억은 여러 피질 영역에 넓게 분산된다.

이렇게 분산된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해마와 피질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서로 연결된 회로로 변한다. 각각의 신경세포가 서로 연접하는 구조적 변화가 따른다.

이 과정을 '기억 공고화'라고 부른다. 이건 '장기기억'이다. 반복된 회상과 감정의 개입을 통해 이 기억은 더욱 견고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이 과정에서 정보는 선별되어 각색되기도 한다.

공고화된 기억이라도 영원히 보전되지는 않는다. 회상하지 않는 기억들은 사라지고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기억 일부분이 사라진다. 뇌의 질병으로도 기억은 사라진다.


왜 오래된 기억은 마지막까지 남는가?

19세기 프랑스 신경학자 리보는 기억이 사라지는 순서를 정리하여 알렸다. 지금도 신경과학에서는 이 현상을 '기억 소실의 역순 법칙'으로 설명한다. 치매 환자는 흔히 방금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오래된 이야기는 기억한다. 뇌종양이나 뇌전이 암 환자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이것은 기억이 무작위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구조 속에서 붕괴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원칙은 뇌 질환이 진행되면 덜 공고화된 최근 기억부터 사라진다. 최근 기억이 먼저 사라지는 반면, 오래된 기억은 마지막까지 남는 경향이 있다. 마지막까지 남는 기억은 가장 넓고 단단한 연결망을 형성한 기억이다.

아버지 젊은 시절에 형성된 아치울의 기억은 아버지 뇌에서 가장 단단하게 공고화된 기억이 틀림없다. 더군다나 아치울은 생존과 관련된 기억이었다. 사람의 뇌는 생존과 관련된 사건을 특별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공포, 감사, 사랑 같은 강한 감정이 동반된 사건은 편도체라는 구조의 작용으로 더욱 강하게 저장된다. 아치울의 기억에는 이 모두가 포함되어 있었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가 있다. 사람은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을 여러 번 떠올린다. 전쟁 이야기, 고향 이야기, 젊은 시절 이야기 같은 것들이다. 기억은 떠올릴 때마다 다시 강화된다. 신경과학에서는 이를 '재(再)공고화'라고 부른다.

기억은 꺼낼 때마다 다시 쓰여지고, 다시 강화된다. 아버지는 평생 아치울 이야기를 여러 번 하셨다. 그래서 그 기억은 공고화, 재공고화를 통해 더욱 단단해졌다. 아버지에게 아치울 기억이 마지막까지 남은 현상은 이와 같은 기억의 구조로 해석된다.


잊지 않기 위해, 나는 차를 마신다

아치울 이야기는 먼 과거의 이야기다. 관계자들이 세상을 떠났고 전쟁 이후 시간도 너무 흘렀다. 최근 아치울은 연예인들이 사는 마을로 관심을 받을 뿐이다.

그러나 아치울 사건은 쉽게 잊어 버려서는 안 되는 기억이다. 아치울 사건은 이젠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전쟁 중 삼엄한 경비를 뚫고 어머니가 아치울로 아버지를 찾으신 덕에 전쟁 후 두 분이 다시 만나 결혼하셨다.

9년 뒤 내 탄생의 전제가 되는 사건이다. 이승에 남은 자로서 이 이야기를 간직할 책임이 내겐 있다. 차가 도움 되는 역할을 해줄 것이라 믿는다.

차는 기억과 관련하여 특정한 상태를 만든다. 차가 만드는 환경은 기억에 유리하다. 차에는 카페인과 테아닌 같은 성분이 있어 정신을 너무 흥분시키지 않으면서도 또렷하게 만든다.

동시에 마음을 약간 느슨하게 풀어 준다. 이 상태는 인간이 기억하기에도, 회상하기에도 좋은 상태다.

더군다나 차를 마시는 시간은 서서히 흘러간다. 물을 끓이고 잎을 우려내고 향을 맡고 잔을 들어 올리는 느린 시간 속에서 사람의 마음은 과거로 향한다.

그래서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는 오래된 기억이 조용히 떠오른다. 찻자리에서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야기 없이 차를 마시다가 어느 순간 누군가가 과거 이야기를 꺼낸다. 고향 이야기, 부모 이야기,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 같은 것들이다.

그뿐만 아니라 차를 마시면서 떠올린 기억은 더 오래 남는다. 기억 회상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차 마시며 떠 올린 기억은 감정 의존적, 상태 의존적 회상이다. 이는 재공고화 과정에 의해 더 강하게 저장되고 회상된다.

차는 이처럼 기억을 다시 쓰게 만든다. 나는 이미 차를 마시며 아치울 기억을 자주 떠올렸다. 앞으로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올해는 한국전쟁 발발 77년째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한국전쟁 속 하나의 삽화와 같은 아치울 이야기는 이제는 내가 간직해야 한다. 차와 함께 이 기억은 내 뇌에서 더 공고해져 오래 유지될 것이다. 언젠가 내 기억이 흐려지는 날이 오더라도 내게 아치울 기억은 남아있으리라.

유영현 티클리닉 디렉터(오디오칼럼 1+1이야기 https://www.youtube.com/@yhyoo0906)

유영현 디렉터 (yhyoo@d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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