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의 시선] 자코메티의 눈

김도형 판사(창원지법 진주지원) 2026. 6. 27.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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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의 성숙도를 판단하는 가장 좋은 기준은 그 사회가 가장 강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아니라, 가장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있다. 경제 규모나 고층빌딩의 수, 첨단기술의 발전 수준만으로는 선진국을 설명할 수 없다. 진정한 선진국은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 장애를 가진 사람, 가난한 사람, 노인과 아이를 향해 얼마나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가에서 드러난다.

실제로 많은 선진국은 약자를 단순히 동정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고, 아동과 노인에 대한 사회안전망을 확충한다. 반면 생존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는 약자를 향한 시선이 쉽게 차가워진다. 경제적 불안이 클수록 사람들의 마음속 관용의 공간은 좁아진다. 진화심리학과 사회심리학 연구 역시 자원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환경에서 사람들이 약자에 대한 배려를 줄이고 경쟁적 태도를 강화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생존이 불안할수록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여유가 줄어드는 것이다.

그러나 성숙한 사회는 약자를 특별한 존재로 바라보는 데서 출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장애인과 비장애인, 강자와 약자라는 구분 이전에 인간 그 자체를 바라보려 노력한다.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작품은 그런 시선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작품 속 인간들은 마치 아사할 만큼 앙상하고 왜소하다. 자코메티가 깎아내려 했던 것은 인간 자체가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허상이 아닐까. 장애와 비장애, 지위와 명예, 재산과 권력이라는 외피를 하나씩 걷어내고 나면, 생존을 위해 필사적이고 죽음 앞에 연약한 인간의 본체만 남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이처럼 장식을 모두 걷어내고 남은 인간의 본질을 가장 적나라하게 목격할 수 있는 공간은 바로 법정이다.

소송이라는 법적 분쟁의 올가미에 걸려드는 순간, 사람들이 평소 자신을 지키기 위해 두르고 있던 사회적 외피는 놀라울 만큼 쉽게 벗겨진다. 거액의 자산가도 배신과 사기 앞에서는 어린아이처럼 절망하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이도 억울함에 울분을 삼키며 소장을 쓴다. 법정에서 마주하는 인간 군상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코메티의 조각처럼 연약한 존재로 수렴된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그저 나약하게 바스러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외피가 벗겨진 자리에서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빛나는 존엄과 정신도 존재한다.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사회적 장식이 제거되어도 쉽게 작아지지 않으며, 타인의 차가운 시선이라는 또 다른 외피에 갇히지 않는다. 자코메티의 눈으로 인간을 바라볼 수 있다면, 겉으로 드러난 장애나 재산, 학력뿐만 아니라, 외피가 벗겨진 뒤에도 당당히 남는 인간의 존엄과 정신을 포착할 수 있다.

서머싯 몸의 소설 《인간의 굴레》에 등장하는 주인공 필립 캐리가 바로 그러한 여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선천적 절름발이인 필립이 겪는 고통은 장애 그 자체보다 그를 바라보는 세상의 일그러진 시선이었다. 그러나 온갖 실패와 상실, 가난의 굴레를 통과하며 성인이 된 필립은 중요한 진실을 체득한다. 자신이 그토록 집착했던 장애라는 외피를 정작 타인은 그리 깊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무감각의 해방감이다. 육체적 속박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는 순간, 비로소 평범한 삶의 축복이 그를 찾아온다.

소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듯, 인간은 저마다의 굴레를 안고 살아간다. 누군가는 가난을, 누군가는 장애를, 누군가는 소송과 실패의 굴레를 짊어진다. 자코메티의 조각처럼 장식을 걷어내고 법정에 선 사람들처럼 외피를 벗겨보면, 결국 우리 모두는 각자의 굴레를 견디며 걸어가는 가냘픈 존재일 뿐이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달은 사람은 타인의 약점을 비웃기보다 연민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연민의 깊이가 한 사람의 품격을, 한 사회의 문명 수준을 결정한다. 어쩌면 문명이란 가장 빨리 달리는 능력이 아니라, 굴레를 지닌 채 가장 느리게 걷는 사람과 기꺼이 발을 맞출 수 있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김도형 판사(창원지법 진주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