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자녀도, 물리학 연구도 ‘내새끼’ … “폭풍같은 세상서 혼자서게 해야죠” [M 인터뷰]
탱크같은 추진력 근원? 초인적 모성애… 男 교수들엔 없는 강점
교육은 ‘기다림’, 성장은 ‘비선형’ … 자신만의 ‘슈퍼파워’ 찾아야
AI시대 체력은 기초학문… 어릴때부터 경험-개념 연결 교육 필요
세금으로 지원받는 학자들, 연구방향·문제 적극적으로 소통하길

“3세 자녀가 ‘근무력증’ 장애를 처음 진단받았을 때 너무 무서웠습니다. 불치병이라 치료할 수도 없어서, 그냥 가만히 멍하니 울고 있기만 했었죠.”
세계 이론물리학계 석학으로 꼽히는 김은아(51) 코넬대 물리학과 교수는 지난 22일 서울 동대문구 고등과학원(KIAS) 세미나실에서 진행된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초인적인 모성애는 제 인생 모든 추진력의 근원”이라며 ‘물리학자 엄마’로서 생존해온 삶의 타래를 풀어냈다. 둘째 자녀의 장애라는 아픔은 물리학만 미친 듯이 팠던 김 교수가 인공지능(AI) 연구의 문까지 연 계기가 됐다. 그는 “같이 공부하던 박사후연구원(포닥)이 매일 너무 신나게 AI 연구를 했는데, 제가 손 놓고 울고만 있지 않을 수 있는 힘이 됐다”며 “일이 극복에 큰 도움이 된 것”이라고 회상했다.
서울대 물리학과 학·석사, 미국 일리노이대 어바나-샴페인 물리학과 박사를 졸업한 김 교수는 AI를 활용해 양자 물질을 분석하는 분야의 세계적 개척자로 불린다. 지난해 설립된 미국 국립과학재단(NSF) 주도 국가 AI 연구소 ‘NSF AI 신소재 연구소(AI-MI)’의 초대 소장을 맡고 있다. KIAS 스칼라(Scholar·학자)로도 활동 중이다. 수학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 수상자인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도 이곳에서 약 7년간 KIAS 학자로 활동하다 지금은 KIAS 석학교수로 있다. 올해 KIAS 설립 30주년을 맞아 김 교수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 10대 남매를 키우면서 연구를 병행하고 계신다.
“나는 엄마 겸 연구자 겸 생활인이다. 매일이 전투다. 특히 미국은 한국처럼 서비스 인프라가 잘돼 있지 않아 스스로 해야 하는 게 많다. 그래서 일상을 ‘알고리즘화’한다. 매일 아침 아들딸 도시락 싸기부터 청소·연구·출장까지 내가 해야 하는 모든 과제를 분석, 시간과 노력의 가성비를 최적화하고 자동화한다. 예컨대 도시락을 쌀 때는 내 몸을 컨베이어 벨트처럼 생각한다. 모든 순서를 정해놓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한 번에 20인분씩 만들어 냉동해 놓는다. 우리 가족이 공유 캘린더를 쓰는 것 역시 알고리즘화의 일환이다. 삶 속에서 두 차례 이상 반복되는 과제는 모두 분석해서 단계를 나누고 뭐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분석한다.”
― 아이를 키우면서 달라진 연구관이 있나.
“교육은 곧 기다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원래 내 신조는 ‘안 되면 되게 하라’였다. 왜냐하면 공부는 내가 열심히 하면 되니까, ‘노력’이면 다 된다고 믿었었다. 그런데 애들을 키워보니까 그게 안 되더라. 내가 얼마나 부족한 게 많은지 애들이 끊임없이 깨우쳐준다. 육아는 사람을 겸허하게 한다. 학습에는 굉장히 많은 반복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내 애도 내가 바꿀 수 없는데, 대학생들을 1∼2년 사이에 바꾸는 건 더 불가능하다. 사람을 바꾸려 하는 게 아니라 알아가려 해야 한다. 다른 삶에 대해 볼 수 있는 관점이 생겼다. 사람은 1보 전진했다가 2보 후퇴하기도 하고, 성장은 비선형적이다. 본인만의 강점을 살릴 수 있는 방향과 연구계가 필요로 하는 점을 최적화시켜서 키워나가야 한다.”
― 남성이 대부분인 물리학계에서 세계적인 여성 석학으로 꼽히신다. 강점이 뭔가.
“제가 탱크처럼 추진력이 굉장히 좋다. 이 근원은 초인적인 모성애다. ‘엄마의 마음’으로 아이디어를 내 새끼처럼 생각한다. 이걸 팔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애가 폭풍우 휘몰아치는 무서운 세상에 나가서 혼자 설 수 있을 때까지 밀어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원래 애를 낳기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공격적으로 토론하고 서열을 찾는 본능이 있는 남자 학자들을 치고 올라갈 수 있을까 고민도 많았다. 하지만 애를 낳고 보니까 ‘내가 더 강하다, 너희들은 출산을 할 수 있게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더라. 제 진통을 옆에서 본 남편은 까무러쳤다. 어떤 분은 ‘은아는 억척스럽다’ 하시더라. 그런데 ‘억척스럽다’는 표현은 남자한테는 쓰는 말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전쟁을 여러 차례 겪으면서 쓰러진 데서 애를 키우고 가족을 지켜내고 나라를 살린 게 그런 억척스러운 어머니와 할머니들의 힘이 있어서다. 그걸 인정하면서도 억척스러운 여자를 내 부인으로 삼고 싶어 하진 않는다는 인식이 있다. 이 ‘억척스럽다’는 표현이 긍정적으로 바뀌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안 쓰면 좋겠다. 대신 ‘대가 세다’ ‘장군감이다’ ‘용감하다’ ‘씩씩하다’는 좋은 표현도 많으니까.”
― 성공한 과학자도 자신감 문제로 힘들 수 있나.
“당연하다. 난 조교수를 막 시작했을 때 내 특장점이 뭔지를 모르겠더라. 남들은 날 알아주는데, 정작 난 뭘 잘하는지 모르는 ‘자신감의 불확정성’이 있었다. 당시 제 포닥 지도교수님이 ‘자신감 있는 태도를 걸쳐라’(You have to wear your confidence)라고 했었는데, 없는 옷(자신감)을 어떻게 입냐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데 남편 덕에 ‘지피지기’(적의 사정과 나의 사정을 자세히 앎)라는 핵심 전략으로 자신감이라는 옷을 입을 수 있게 됐다. 남편은 나를 가장 잘 알고 인정해주는, 낙관적인 사람이다. 어느 날 남편에게 ‘그거 당연히 누구나 잘 아는 거 아냐?’ 했는데, 남편이 ‘아냐, 너한테만 빤하게 보이는 거야’라고 하더라. 나한테 쉬운 게 남들에게 쉬운 게 아니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그래서 그때부턴 ‘나한테 가장 쉬운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구직 시장에 나가는 학생들에게도 항상 이 얘길 해준다. ‘너의 특장점과 고용자의 수요가 딱 맞았을 때 서로 만족하는 관계가 된다’ ‘네게 제일 쉬운 게 너의 슈퍼파워(super power)와 연결될 거니, 네 자신을 깊이 살펴보라’고.”
― ‘전자들의 사회’를 연구한다고 표현하셨다. 인간 사회와 전자 사회가 닮은 점도 있나.
“나는 ‘양자 다체계’(전자나 원자 같은 입자가 아주 많이 모여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시스템)를 연구하는 학자다. 세상을 만드는 건 ‘양성자’ ‘중성자’ ‘전자’ 이렇게 3가지다. 원자들이 모여서 모든 물질을 만들지만, 서로의 상호작용으로 물질 전체의 성질인 ‘물성’이 달라진다. 사회에서도 각각 문화가 다른 것과 비슷하다. 사람 사회와 다른 것도 있는데, 전자 하나하나는 법을 반드시 지킨다는 것이다.”
― AI 시대에도 여전히 기초학문이 중요한가.
“기초학문은 기초체력과 같은 것이다. 세계 경제강국인 나라 어느 하나도 기초학문이 강하지 않는 곳이 없다. 물리학을 비롯해 기초학문은 기술 경쟁력의 근간이다. 당장 돈이 되는 응용학문도 중요하다. 하지만 피겨스케이트 선수의 경우 기본 훈련으로 근육과 밸런스를 다지지 않나. 사람의 운동능력도 기초체력이 돼야 거기다 뭘 쌓을 수 있듯, 나라의 기초학문이 무너지면 기술 발전이 없다. 한국은 나름 기초학문에 많이 투자했다. 그래서 작은 땅덩어리에 비해 근간이 좋은 편이다. 요즘 해외에 나가보면 일본·중국 물리학 전공 학생들이 특히 자기 뿌리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 우리나라 학생들도 그 학생들처럼 자신감을 가지면 좋겠다.”
― ‘물리학은 어렵다’는 인식이 강해 사람들이 멀리하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기초학문의 가치를 대중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왜 어려운지를 모르면 적대감까지도 들게 된다. 수학과 언어라는 개념을 섞어서 쓰는 게 물리다. 뭐 하나가 빠지면 물리가 안 된다. 아예 어릴 때부터 경험으로 기초 물리 개념들을 학습시켜주는 교육을 탄탄하게 잡아놓으면 물리에 대한 적대감이 비교적 사라질 거다. 인구 절반이 물리학 싫다고 얘기하면 지원도 쉽지 않을 수밖에 없다. 학자들의 경우 본인의 연구가 뭘 추구하는 건지 소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누구나 내는 세금으로 연구비를 지원받는 거면, 이 연구는 어떤 생각을 하는 거고 어떤 문제를 푸는 건지 소통해야 한다.”
― AI 시대 교육은 어떤 방향으로 이뤄져야 할까.
“각자의 ‘호기심’을 찾고, 그것에 기반한 교육이 좋은 교육이 아닐까. 호기심은 배움의 연료다. 학생들은 모두 궁금해하는 방향이 다르다. 호기심은 밖에서 주입시키는 게 아니라 본인이 찾는 거다. 본인 마음에서 나는 거다. 예전에는 학력고사만 잘 보면 됐다. 그런데 요즘은 내신·수능·봉사활동·악기·운동 이런저런 걸 다 해야 하니, 오히려 ‘나를 찾는 시간’이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자기를 찾은 사람이 행복하고, 세상에 기여를 할 수 있다.”

■ 김 교수의 스트레스 해소법
김은아 코넬대 물리학과 교수의 스트레스 해소처는 ‘김치 담그기’다. 힘든 일이 끝나면 늘 김치를 담근다.
왜 김치일까. 김 교수에게 김장은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내면이 단단하고, 전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천재 물리학자’로 보이는 그였지만 엄마 얘기를 할 때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제가 박사 학위 따는 중에, 엄마가 59세 때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엄마와 굉장히 친했던 데다 애를 낳아서 키우다 보니까 더 보고 싶어요. 어릴 때 엄마가 김치를 담그면서 항상 맛보라고 줬거든요. 김치 담글 때만 맡을 수 있는 고춧가루, 마늘, 생강, 젓갈 섞였을 때 날것의 향이 있어요. 그 향들이 엄마와의 기억을 불러오기에 김치를 담급니다.”
김 교수는 김치 담그기가 교육과도 닮은 점이 많다고 했다. ‘기다림’과 ‘기초’라는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김치는 변수가 많습니다. 익어봐야 안다는 점이 교육과 비슷합니다. 사람은 기다려야 어떻게 컸는지를 알 수 있죠. 처음에 김치를 담글 땐 ‘절이는 것의 중요함’을 몰랐습니다. 그냥 양념이 중요한 거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절일 때 잘 절여야 합니다. 기본 재료인 배추가 얼마나 좋은지도 매우 중요합니다. 교육에서도 기초가 핵심입니다. 교육과정에서 기초를 탄탄하게 다져놓지 않으면 나중에 부족한 기초를 채우는 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김치를 담그면서 학생들 생각도 합니다.”
김 교수는 요리하는 것 자체를 특히 좋아하기도 한다. “원래 한 상 크게 차려서 사람들 먹이는 걸 좋아해요. 제가 정말 오랜 시간 할 수 있는 게 요리입니다. 예전에는 어렵고 복잡한 것도 많이 만들었어요. 아이들도 내가 싸주는 도시락을 좋아해요. 그나마 엄마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도시락이에요. 그래서 저는 매일 아침 도시락을 쌉니다.”
이예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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