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걸려 날아왔어요"... 하노이 폭염보다 뜨거운 '한국e스포츠' 앓이[아세안 속으로]

정지용 2026. 6. 26.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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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팬 5000여 명 하노이 체육관 메워
실패 딛고 일어선 선수들 서사에 열광
K팝 아이돌 문화가 e스포츠 팬덤에 이식
단순 오락 넘어 Z세대의 '인생 본보기'로
2024년 LCK 결승 현지 동시 시청 56만
18일 베트남 하노이 꽌응어 체육관에서 만난 하노이법대 2학년 민 하이는 "오프라인 행사 분위기는 뜨겁고 감동적이기 때문에 팬미팅이나 단체관람 행사가 있을 때마다 최대한 참여하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하노이=정지용 기자

“제게 한화생명 e스포츠팀(HLE) 응원은 단순한 취미 이상이죠. 선수들이 역경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며 저도 어려움에 맞설 용기를 얻거든요. 배울 점이 많은 삶의 본보기 같아요.”

18일(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 꽌응어 체육관. HLE 팬미팅 행사를 찾은 하노이법대 2학년 민 하이(20)가 "나는 한화 팬"이라는 손팻말을 들고 이렇게 말했다. 그는 “HLE가 어려움을 딛고 리그오브레전드(LOL·롤) 한국 리그(LCK)를 대표하는 팀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노력과 끈기의 중요성을 배웠다”고 했다.

한국팀을 향한 열렬한 응원에, 현장은 K팝 아이돌 콘서트장을 방불케 했다. 제우스(최우제·22), 카나비(서진혁·26), 제카(김건우·24), 구마유시(이민형·24), 딜라이트(유환중·24) 선수가 모습을 드러내자 체육관은 거대한 함성으로 가득 찼다. 곳곳에서 선수 이름을 연호하는 목소리가 터졌다.

미국 버지니아대 재학생인 중(20)은“고등학교 시절부터 롤을 즐기며 선수들을 지켜봐서 이들은 제게 스타이자 친구”라며 “비행시간만 이틀(26시간)이 걸렸지만, 좋아하는 이들을 직접 볼 수 있어 정말 기쁘다”고 웃었다.

꽌응어 체육관 3,500석을 가득 메운 한화생명 e스포츠팀(HLE) 팬들. 하노이=정지용 기자

베트남 Z세대, 한국 게임에 빠지다

이들의 이야기에는 베트남 Z세대가 한국e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가 담겨 있다. 경기를 즐기는 데 그치지 않고, 선수들의 도전과 성장 드라마에 몰입하는 게 이들의 특징이다. 최근에는 여성 팬층이 빠르게 유입되면서 'K팝 아이돌형 팬덤'이 베트남 Z세대의 대표 문화로 자리 잡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로 이날 꽌응어 체육관은 HLE 선수를 보기 위한 팬들로 발 디딜 틈 없었다. 팬미팅 규모도 첫해인 2024년 1,500명에서 지난해 2,500명, 올해 3,600명으로 늘었다. 티켓을 구하지 못했지만 현장 분위기를 느끼러 온 팬들을 포함하면 5,000여 명이 참여했다. 지난해의 두 배 수준이다.

구단 관계자는 “VIP석(약14만7,000원) 티켓은 판매 시작 2분 만에 매진됐고, 전체 티켓도 1시간 30분 만에 모두 팔렸다”고 했다.

최고기온 35도, 습도 60%를 웃도는 무더위도 팬들의 열기를 막지 못했다. 체육관 밖 공식 상품(굿즈) 구매 부스 앞에는 200m 달하는 대기 줄이 이어졌다. 팬들은 선수 입간판 앞에서 사진을 찍고, 체육관 곳곳에 모여 손팻말을 만드는 데 열중했다. “우승컵 꼭 가져와 주세요”, “우리, 너희 보러 여기까지 왔어” 같은 문구가 한글로 적혀 있었다.

한화생명 e스포츠팀(HLE) 팬들이 땡볕 더위 속에서 체육관 밖에 모여 선수들에게 보여줄 손팻말을 작성하고 있다. 이들이 입은 검은색 옷은 HLE의 유니폼이다. 하노이=정지용 기자

선수 성장과 매력에 공감

베트남의 한국 e스포츠 열풍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는 여성 팬덤이다. 이날 행사장에도 20대 여성 팬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남성 팬들이 경기 전략과 승패에 집중한다면, 여성 팬들은 선수들의 성장 과정과 인간적 매력에 공감하는 점이 특징. 한국일보가 현장에서 들은 팬들의 목소리에서도 이런 경향이 뚜렷했다.

“이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네덜란드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어요. 학생 때부터 롤을 즐겨 했고, 2023년부터는 HLE에 ‘입덕’(팬 활동)했어요. 팀이 질 때는 속상하지만, 그래도 경기를 지켜보는 것 자체가 큰 즐거움이에요. 예전에는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는데,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 만나 함께 응원하면서 일상도 더 긍정적으로 변했어요.”(차우 장·23)

“티켓 경쟁이 치열했는데 운이 좋아 올 수 있었어요. 구마유시 선수의 팬으로 시작했는데, 다른 선수와 팀을 알아가면서 매력을 느껴 이제 팀 전체를 응원해요. 선수들이 힘든 시기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음 경기에 승리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아요. 실패도 성장의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투이즈엉·20)

한국e스포츠는 베트남 팬들을 연결하는 공동체 역할도 하고 있다. 민 하이는 “처음 만난 사람들이 같은 팀을 응원한다는 이유만으로 친구가 돼 하이파이브를 하며 기뻐한다”며 “오프라인 모임은 혼자 경기를 볼 때 느낄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을 준다”고 했다.

호찌민 사회과학대학교 재학생 니으 쿠잉(21)은 “혼자 하는 첫 여행이라 긴장했는데 공항에서 HLE 옷을 입은 팬들을 만나고 친해져 체육관까지 함께 왔다”고 했다.

대만에서 남편과 함께 참석한 응급실 의사 황츠위에는 "오렌지(팬클럽 애칭)들은 최선을 다해 마지막까지 응원할 테니 꼭 우승을 차지해 달라"고 했다. 네덜란드에서 날아온 차우장은 "HLE 팬미팅이 매년 제 생일과 비슷한 시기에 열려 꼭 생일 선물 같다"고 했다. 하노이=정지용 기자

팬덤 확산 최적의 조건

베트남은 e스포츠 팬덤이 확산될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인구 1억 명 중 45%가 디지털에 익숙한 2030세대다. 전체 인구의 55%가 온라인 게임을 즐기고, 16%는 e스포츠 시청 경험이 있다. 롤은 스마트폰과 PC를 통해 쉽게 접할 수 있고, 다른 장르에 비해 폭력성과 선정성이 낮아 여성들의 진입 장벽도 낮다. 선수 대부분이 20대 초중반이라는 점도 Z세대 팬층과 공감대를 키우는 요소다.

한국 e스포츠의 압도적 경쟁력도 팬덤 확산을 뒷받침했다. 한국은 롤 세계 챔피언십(롤드컵)에서 총 10차례 우승하며 중국(3회), 유럽·대만·홍콩·마카오(각 1회)를 크게 앞서고 있다. 2024년 LCK 리그 결승전은 한국 리그임에도 베트남에서만 동시 시청자 56만을 기록했다.

김성훈 HLE 단장은 “베트남은 HLE 공식 멤버십 가입자가 한국 다음으로 많은 핵심 시장”이라며 “처음에는 마케팅 차원에서 시작한 팬미팅이지만, 이제는 팬들과 단단한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고 했다. 그는 “베트남에 머무는 시간이 1년에 하루이틀뿐이지만, 그 시간을 얼마나 더 의미 있게 보낼지 계속 고민할 것”이라고 했다.

하노이= 정지용 특파원 cdragon2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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