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 “삼성·SK 호남 투자”... 정치에 휘둘리는 반도체

김태준 기자 2026. 6. 25.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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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 “삼성·SK와 논의 마무리 단계
수도권 공장 옮기는건 결코 아냐”
업계 “부지 검토 보통 7년 걸려”
野 “전략산업 최악의 관치 경제”
최태원(왼쪽) SK그룹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해 11월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이재명 대통령 주재로 열린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에서 대화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400조원 이상으로 추산되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사상 최대 규모 호남 반도체 투자를 청와대가 공식화했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24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토론회에서 “(관련) 논의가 마무리 단계”라고 밝혔다. 반도체 공장 투자는 천문학적 자금이 투입되기 때문에 보통 검토에만 7년 이상이 소요되고, 이 과정은 철저히 비밀리에 추진된다. 그런데 이번 투자는 청와대와 여권이 시기, 규모, 지역 선정에 각종 주문을 쏟아내며 결정에 관여하는 모양새였다. 야당은 국가 핵심 전략 산업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국민의힘 박성훈 수석 대변인은 “이재명 정권이 지방 균형 발전이라는 포장지로 기업의 투자 방향을 사실상 유도하거나 압박하고 있다”면서 “최악의 관치 경제”라고 했고,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정권이 팔을 비틀어서 삼성과 하이닉스를 호남으로 보낸다”고 주장했다.

청와대는 29일 ‘국토 공간 대전환’ 민관 합동 회의를 여는데, 이를 계기로 두 기업은 조만간 투자 내용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9일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만나 관련 논의를 마쳤고, 25일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만난다. 이 과정에서 당초 반도체 후공정인 패키징 공장 정도를 고려했던 기업들은 정치권의 요구에 따라 결국 최첨단 회로를 그리는 팹(전 공정)까지 신설하는 방안을 조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픽=양인성

청와대는 기존에 추진 중인 용인 공장을 호남으로 옮기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김 실장은 “수도권에 짓고 있는 공장을 옮기는 것이 결코 아니다”라며 “용인이 다 차는 것을 보고 나서야 ‘다른 데 시작하자’고 하면 그때는 이미 늦는다”고 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2035년경 포화 상태에 이르니, 지방에 별도의 새 공장을 지어야 한다는 얘기다. 또 “정부가 지방 균형 발전을 추구한다고 해서 기업들이 이런 어마어마한 투자를 쉽게 결정할 리 없다”고 했다. 정부가 강요한 투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안기현 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수도권의 물 부족 등으로 비수도권을 찾아야 하는 상황은 맞다”면서도 “반도체 공장을 짓는 데 통상 부지 검토만 7년 이상이 소요된다. 그 과정은 철저히 비밀리에 수행되고, 여러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추진 과정이 알려지면 땅값이 올라 실제로 추진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7월 전남·광주광역시 출범 맞춰 반도체 발표… 광주 軍공항 부지 유력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는 이 대통령이 작년 12월 10일 ‘K반도체 비전과 육성 전략 보고회’에서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남쪽 지방으로 눈길을 돌려서 그 지역에서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관심을 가져달라”고 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후 광주·전남 통합, 대전·충남 통합 같은 정치 이슈와 맞물려 논의가 증폭됐다. 지방선거가 다가오자 민주당 호남 후보들은 앞다퉈 반도체 투자 유치 공약을 내세웠다. 민주당에서 “반도체 호남 이전이 내란 종식”이라는 구호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에 대해 용인 등 수도권에서 반발이 일어나자 청와대는 “클러스터 대상 기업 이전을 검토하지는 않은 상황”이라고 진화했다.

정진욱 국회의원이 8일 광주시의회에서 반도체 팹 광주 유치 토론회를 열고 있다. /뉴스1

그러나 6월 지방선거 직후 여권을 중심으로 반도체 호남 투자론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청와대에서 논의가 급진전됐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이 대통령이 최태원, 이재용 회장을 잇달아 만난다는 사실이 공개됐다. 호남 정치권에선 “7월 1일로 예정된 광주·전남 통합 특별시 출범에 타이밍을 맞출 것” “8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호남 민심을 얻을 수 있는 카드”란 말까지 나왔다. 호남 반도체 투자 발표가 정치 일정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야당이 이번 투자에 대해 “정권의 호남 챙기기”라고 비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 사안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목적에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정부에) 다른 인프라 투자를 제안해도 무조건 반도체, 다른 지역을 희망해도 무조건 호남으로 가야 하는 분위기”라고 했다.

한편에서는 AI발 메모리 수요가 폭발하면서 반도체 공장 증설에 대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셈법이 달라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삼성전자는 현재 건설 중인 평택과 토지 수용 단계인 용인 팹(6기) 공사 기간을 최대한 단축한다는 방침으로 알려졌다. 차세대 반도체 라인을 지을 ‘포스트 용인’이 필요한 시점도 당초보다 앞당겨지는 셈이다. 삼성전자에 비해 생산 능력이 작은 SK하이닉스는 추가 팹 건설이 더 절실하다.

용인이 입지상 한계로 추가 확장이 어렵다는 점은 정부와 반도체 업계가 공감하는 대목이다. 문제는 용인을 이을 대규모 입지가 마땅찮다는 점이다. 최소 100만평 이상의 평지, 초고압 전력, 하루 수십만t의 초순수(超純水), 그리고 건설 인력부터 기술자, 석·박사급 인재까지 아우르는 인력 풀과 반도체 협력 생태계가 모두 갖춰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용수는 리사이클을 통해 반도체 용수 재이용률을 끌어올리게 되면서 과거에 비해 어려움이 줄고 있다.

최대 관건은 엔지니어 확보다. SK하이닉스·DB하이텍 등 300여 반도체 기업이 있는 충북은 수도권과 접해 있는데도 인력난이 극심하다. 많은 기업이 저숙련 오퍼레이터부터 장비 유지·보수 인력, 엔지니어, R&D 인력, 사무직까지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한 반도체 후공정 기업은 직종을 가리지 않고 1년 내내 상시 채용 공고를 내는 처지다. 팹리스(반도체 설계) 기업은 석·박사 인력 채용이 어려워 최근 동남아 출신 인력을 채용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현재 남방한계선으로 통하는 이천·평택조차 지리적으로 멀다는 불만이 팽배한데 호남에서는 인력 문제가 훨씬 큰 과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특히 HBM(고대역폭 메모리) 제조는 개발과 생산 공정이 밀접하게 연계돼 있어 개발자들이 대규모로 생산 현장에 투입돼야 한다. 수천 명 인력이 최소 수년 동안 반도체 팹 인근에서 생활해야 하는 만큼 정주 여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당장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지역은 현재 국내에 없다는 게 업계의 진단이다. 최소 10년 단위의 장기 인프라 구축 기간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역설적으로 이 ‘10년의 시차’가 정부와 반도체 업계의 이해 절충을 가능하게 한 고리가 된 것으로 풀이된다. 정부는 당초의 ‘용인 반도체 분산론’을 접고 ‘포스트 용인’ 역할을 할 부지와 인프라를 제공하고, 반도체 기업들은 당장 풀기 어려운 차기 입지 고민을 해소한다는 것이다.

군 공항이 무안 등으로 이전하고 남는 광주 군공항 종전 부지가 유력한 입지로 거론된다. 관건은 최소 10년이 걸리는 인프라 조성 등의 과제를 5년 단위로 정권이 바뀌는 현실에서 흔들림 없이 해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반도체 사이클의 변동성을 감안할 때 급조된 대규모 투자 계획이 향후 다운사이클(경기 하강기) 진입 시 흔들릴 수 있다는 점도 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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